- 이지연 수석기자
- 승인 2017.07.27 13:47
- 호수 150
국내 영어 사교육 시장 규모는 8~12조 원에 달한다. 한 사람이 평생 영어교육에 소비하는 비용이 2억 원이라는 통계도 있다. 어디 돈뿐이겠는가? 영어에 매달려 있는 시간도 비용 못지않을 것이다. 그 결과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영어교육 인프라가 갖춰진 나라가 됐다. 최고의 학원과 강사, 교재도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외적인 규모가 실력을 대변하지는 않는다. 스웨덴 글로벌 교육기업인 EF(Education First)가 2016년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국가를 제외한 세계 70개국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우리나라 국민의 영어 실력은 27위에 불과했다. 교육비 지출비율은 높지만 영어는 못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무료 영어강좌를 제공하는 박기범 한마디로닷컴 대표는 “영어를 공부하지 않고 영어학습법을 공부하거나 무작정 영어를 많이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다.”라고 지적했다. 이어“언어는 생각을 담는 것이다. 한국어로 자기 생각을 조리 있게 표현하지 못하면 영어도 잘할 수 없다.”고 말했다.
억대 연봉 인기 강사로 교육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박 대표가 한마디로닷컴 (hanmadiro.com, 이하 한닷)에서 실현하고 싶은 것도‘생각을 담은 영어’다.
“공기와 햇살 등 삶에서 필요한 모든 것은 무료로 제공된다. 교육 역시 삶에서꼭 필요한 것인데 무상으로 제공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말하는 박 대표를 강화도 자택에서 만나, 그의 교육 철학과 비전을 들어봤다.
배움은‘스스로 깨우치는 과정’
영어교육도 쇼핑하는 시대다. 인터넷을 조금만 찾아봐도 무료와 유료강좌가 매우 많다. 공부하려는 의지만 있다면 못할 게 없는 세상이다. ‘2달 완전 정복’, ‘하루 10분만 영어하라’, ‘영어 왕초보 20일 만에 영어 달인’ 등등 믿고 싶어지는 광고 문구가 눈과 마음을 현혹한다. 하지만 영어는 쉽게 정복되는 대상이 아니다. 노력과 공을 들여야 결실도 알차지만, 현대인들은 바쁘다는 핑계로 돈으로 실력을 구매하려고 한다. 교육업체는 이런 시류를 타고 마케팅에만 치중하는 모습이다. 결과적으로 영어 사교육 시장은 점점 성장하는 반면 영어 실력자는 늘어나지 않고 있다.
박 대표는 “무언가를 배운다는 것은 ‘스스로 깨우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남이 대신해 줄 수 없는 영역이다. 최고의 선생님, 최고의 강의는 없다. 최고의 학생만 있을 뿐이다.”라며 “화려한 학원이나 인터넷 강의로 공부한다고 예전보다 쉽게 영어를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사실 그는 업계 최고의 강사였다.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으로 유학을 떠났다. 서던캘리포니아 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에서 커뮤니케이션 석사 과정을 마치고 돌아와 신문사 기자가 되기 위해 준비를 했다. 당시 가족들이 모두 뉴질랜드로 이민 간터라 홀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했다. 언론고시를 대비하면서 생활비도 벌어야 했기에 일단 이익훈 어학원에서 토플 강사로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재미가 그곳에 있었다. 학생들에게 ‘영어 공식’이 아니라 미국에 가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영어를 가르치는 즐거움이 쏠쏠했다. 더불어 수입도 괜찮았다. 하루 2~3시간 강의하고 첫달에 450만 원을 월급으로 받았다. 6개월 후에는 1,000만 원까지 수입이 올라갔다. 10년 가까이 현장에서 경력을 쌓으며 억대 연봉을 받았 다. 모든 이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그는 돌연 한마디로닷컴을 창업하고 무료 영어강좌를 개설했다.
“학원 수업료를 마련하려고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여대생 제자가 있었다. 학원에 남아서 자율학습 못하고 일찍 가야 해서 미안하다고 말하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무료 강의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교육은 다른 사람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조화롭게 살기 위해 받는 것이다. 한 사람이 영어를 잘하면 그 주변이나 회사, 사회 넓게는 국가 전체가 혜택을 받는다. 그런데 그 교육에 필요한 비용은 각자 책임지라고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 것일까. 엄청난 사교육비 부담과 경쟁체제로 고통받는 수강생들을 매일 접하면서 ‘나는 돈 많이 벌고 가르치는 것이 재미있으니까 참 아름다운 세상이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일개 학원 강사인 나라도 학생들이 비용부담 없이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했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모두 무료
한닷을 운영한 지도 벌써 6년째다. 2011년 네이버 카페로 시작해 2013년 1월 정식 법인으로 등록했다. 2012년에는 한국사회적기업 진흥원이 주관하는 ‘청년 등 사회적기업가 육성사업 창업팀’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무료로 영어 강의를 제공하는 공익성이 인정된 것이다. 처음과 마찬가지로 지금까지 박 대표와 아내가 무급 알바로 근무 하고 제자 몇 명이 회계와 사이트 관리를 도와주고 있다. 유료강좌가 아니라고 질이 떨어지지 않을까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강의 내용은 물론 화면 구성과 자막 등등 유료 사이트와 비교해도 절대 뒤지지 않는다. 박 대표는 독학으로 촬영, 편집 기술을 익히며 강의 영상 제작에 공을 들이고 있다. 그의 강의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로 전신이 마비된 제자는 2주에 한 번 ‘공부할 수 있어서 너무 감사하다’고 메일을 보내고, 말기 암 환자 제자는 ‘죽기 전에 영어 공부나 마음껏 하고 싶은데 무료라서 좋다. 강의 듣는 시간이 제일 마음이 편하다.’고 메시지를 전해왔다. 취업준비생인 제자는 한닷에서 취업에 필요한 영어공부를 했고 유명 기업에 입사한 후 첫 월급에서 100만 원을 수강료로 자율납부했다. 방송인 정재환 씨도 한닷의 열성 학생이다. 정 씨는 모든 강의를 2회 완강한 후 영어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며, 한닷을 알리는 일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돕겠다며 재능기부로 여러 강의에 참여하고 있다.
“우리 캐치프레이즈가 ‘햇살, 공기, 생명 등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들은 모두 무료’이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전부 공짜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무료로 제공하려면 내 강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어야만 했다. 스스로에게 항상 ‘내 강의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맞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더 열심히, 더 자세히 강의를 만들었고 나름대로 만족스럽다. 무료교육의 질이 너무 떨어지거나 사교육에 비해 형편없다면 안 하느니만 못하다.”
광고 없이 무료강좌를 운영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한닷의 유일한 수입원은 박 대표가 직접 집필한 교재뿐이다. 그것도 필수는 아니다. 강의는 교재 없이도 수강할 수 있고 회원들이 필요에 따라 자율적으로 구매하면 된다. 소중한 강의를 만들기 위한 그의 노력과 열정에 8만 4,000여 명의 회원들이 한닷에서 무료로 영어를 공부하고 있다. 연령 대도 초등학생부터 70~80대까지 다양하다. 모두 한닷과 박 대표를 응원하고 지지한다. 최근 마련한 북콘서트에 충북 제천, 미국, 뉴질랜드 등에서 팬 100여 명이 박 대표를 만나기 위해 찾아온 것만 봐도 한닷과 박 대표에게 갖는 그들의 감사와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
“6년 동안 한닷을 유지하고 있다. 당연히 어려움이 많았고 지금도 많다. 그렇지만 포기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회원들은 계속 늘어나고 환경도 좋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회원들에게 희망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회원들도 한목소리로 ‘박기범 강사가 잘됐으면 좋겠다. 계속 무료로 공부할 수 있으면 좋겠다.’며 응원해준다. 하루에 교재 3~4 권만 판매되면 아내와 굶지 않고 살 수 있다. 무료강의지만 공부하신 분들이 교재를 대량 구매하거나 자율 수강료를 보내주셔서 큰 힘이 되기도 한다.”
지난 6월 말부터는 박 대표와 정재환, 김마주 씨가 함께 진행하는 ‘한 마디 여행영어’가 JEI잉글리쉬TV에서 방영 중이다. 무상교육을 실천하는 박 대표의 미션과 비전에 동의한 재능교육이 사회환원 차원에서 제작 비용과 스튜디오를 제공하고 영상을 TV, 홈페이지, 팟캐스트 등에서 무료로 배포하기로 한 것이다.
영어를 통해 미래 비전을 제시
박 대표는 세상의 모든 배움에는 이론과 실제가 반드시 병행되 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어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전체적인 원리에 대한 이해가 우선시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원리를 분명히 이해했다면 다양한 응용을 시도하고, 이후 단순 반복이나 암기, 훈련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닷 강의에서도 그는 무조건적인 암기 대신 이해와 응용, 토론을 해보라고 학생들에게 독려 한다. 학교나 학원에서 흔히 듣는 ‘A는 B다’식의 공식이 아니라 낯설 어하는 이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대표가 이러한 수업 방식을 고수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년 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멋진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4차 산업혁명과 기술발전으로 완벽에 가까운 통역기, 번역기도 나올 것이 다. 하지만 사람만이 갖는 장점이 있다. 기계가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대신하기 어렵고 그 분위기와 상황을 담아내기는 힘들다. 영어는 국제 언어다. 영어를 잘하는 사람들은 시대의 리더가 될 가능성이 높다. 영어 강사로서 나는 20년 후의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 하고 노력할 것이다. 영어를 통해 미래 시대에 대한 아이디어와 비전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