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가도 사람 가리는 재주가 있나 보다. 주말 껴서 5일이라는 짧지 않은 일정에 광속 클릭으로 어렵사리 구한 성수기 제주여행 패키지였거늘, 연일 내리는 비에 리조트 안 편의점 매상만 올려주고 돌아온 꼴이라니. 나를 포함해 함께 여행을 다녀 온 내 친구들은 덕을 좀 더 쌓을 필요가 있다. 다들 내 일정이 안타까워서인지 점심식사에 커피에 대접이 극진한 가운데, 옆 테이블에서도 같은 이야기가 한창이다. “요즘은 여름휴가 해외로 가려고 3, 4월부터 준비하잖아. 우리 사촌 언니는 6월에 운 좋게 특가상품 구해서 7월에 세부 갔다 왔거든. 나도 내년엔 미리 계획을 짜야지, 안 그럼 제때 표도 없고 가격도 너무 비싸. 올해는 일단 접어야지.” “나는 그렇게 날짜 미리 잡아놓고 딱 맞춰 가는 사람들 신기하더라. 혼자 가는 것도 아닐 거고 다들 직장생활 일이 그렇게 날짜에 맞춰 돌아가주나? 날씨나 현지 사정도 걱정이고......” “뭐 이런 구석기 원시인이 있어? 회사 일 혼자 다 해? 일 년에 한 번인 여름휴가도 제대로 못 쓰면 진정한 직장인이 아니지. 프랑스 사람들은 한 달짜리 바캉스 하나 믿고 일 년을 버틴다는데. 길게는 두 달도 쉰단다. 우린 길어야 일주일인데 그것도 못 즐기면 왜 사냐. 자기도 내년엔 해외 한 번 가.” 듣고 있자니, 나처럼 운 나쁘게 시간과 비용을 날리고 돌아오는 것보다는 차라리 ‘경제적인 구석기 원시인이 되는 편이 낫겠다’ 싶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년 여름휴가는 또 어딜 가볼까 벌써부터 장소 고민이 되는 걸 보니 휴가의 달콤함은 상상이 절반이다. 띄엄띄엄 휴가 떠난 사람들의 빈자리가 그나마 사무실의 열기를 식혀주는 오늘, 모두들 달콤한 상상을 하며 열심히 각자의 여름을 나고 있다. 계절의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본부장님의 어두운 표정이 가시지 않은지 며칠째. 말수도 급격히 줄어드셨고 식사도 같이 안하신지 꽤나 오래됐다. 무슨 일 있으시냐고 여쭤보아도 괜찮다고만 하시고, 본부장님을 아버지처럼 모시는 수다쟁이 최 대리님과 그의 앙숙 한 팀장님도 갑자기 철학자라도 된 듯 말수가 줄었다. 내 끔찍했던 제주여행을 제물 삼아 분위기를 띄워볼까 싶어도 정적의 무게감에 그냥 포기하고 만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만 가득할 뿐. 우리의 기분과는 전혀 무관하게 일터의 하루하루가 돌아가던 중 본부장님이 조용히 한 팀장을 부르시더니 한 30분 지나 가방을 챙겨 급히 나가셨다. 예감이 별로 좋지 않다. “신형 씨 경조사 품의 하나 올리자. 본부장님 모친상. 일단 화환부터 신청하고 휴가일정은 나중에. 아니다, 일단 전사공지 올리고 화환이랑...... 우리 팀은 오늘 일 마무리 짓고 바로 움직이자고.” 팀장님의 두서없는 말에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장례식장 정보도 없이 공지는 어떻게 올리며 화환은 어디로 보내나’ 하는 이런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면 나는 내 뺨을 한 대 내려쳤을 거다. 누가 돌아가셨다고? 본부장님 어머니는 우리 본부 사람들이라면 다 아는 아니, 알아야만 하는 분이다. 명절같이 특별한 날은 물론이고 어떤 때는 깜짝 선물로 떡이며 과자며 하나하나 포장해서 직원 이름까지 손수 적은 쪽지와 함께 보내시고, 저번 회식 2차로 댁에 방문했을 때도 늦은 시간 민폐에도 불구하고 고운 한복차림으로 반겨주셨다. 나는 입사한 지 아직 1년도 안 되어 어머니와의 추억은 적지만 한 팀장님, 최 대리님과 몇몇 직원들에겐 아주 특별한 분 이라 들었는데 아무래도 뭔가 갑자기, 그러니까 너무 갑자기 문제가 된 모양이다. 우리 팀원들은 각자 조용히 할 일을 마무리하고 장례식장으로 떠났다. “나랑 최 대리는 사실 월초에 본부장님께 들었어. 대장암 말기에 신장까지 전이된 게 워낙 연세도 있으시고 하니 손을 못 쓴 모양이야. 그래도 시간은 좀 있을 줄 알았는데 갑자기 돌아가시네.거 참......” 회사와 가까운 장례식장, 차로 30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는 거리임에도 그 짧은 시간이 우리에게 쥐어준 무게는 모두가 견 디기 힘들었다. “어, 왔어? 고맙다. 다들 갑작스러워서 놀랐지? 식사들 하고 한팀장 잠깐 얘기 좀 하지.” 밥이 넘어갈 리 없었다. 본부장님의 상복차림과 퉁퉁 부은 두 눈, 쉰 목소리는 너무 낯설고도 뜨겁기까지 했다. 일전 한 팀장님모친이 치매를 앓고 계시다는 얘기를 술자리에서 직접 전해주셨을 때가 문득 떠오른다. 남의 어머니 지병도 자신의 일처럼 마음쓰셨던 분인데 지금 당신의 심정을 감히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사회에서 맡은 짐 또한 가볍지 않기에 한 팀장님을 따로 불러 단도리를 하셨다. 일손을 거들며 새벽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안 많은 회사 사람들이 다녀갔다. 고인이 또한 아들처럼 챙기셨다며 흐느끼는 한사람, 그토록 냉철한 대표님의 눈물도 우리는 지켜보았다. 나를 아꼈던 참으로 좋은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어느 누구도 감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임을 이 현장은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장례를 치른 이후에도 본부장님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있다. 아무리 대표님의 배려라 할지라도 사실 본인 개인사정으로 이토록 자리를 오래 비우신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책임감보다 더 큰 상실감이 그 분을 아직까지 붙잡고 있는 것 같다. 갑자기 찾아 온 한 달의 휴가라니, 못다한 효도와 허한 마음을 달랠 여유가 조금은 더 생겼으니 다행스럽지만 이런 특별한 배려를 받기 힘든 대부분의 직장인이 겪는 똑같은 아픔을 생각하니 씁쓸하기도 하다. 휴가가 길어진다고 아픔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매년 돌아오는 여름휴가는 우리에게 계획의 기회와 준비의 시간, 그 사이 숨은 많은 재미와 즐거움을 사전 예고하고 있지만 이렇듯 예고치 않은 긴 휴가는 무얼 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지 않기 위해서 온다. 본부장님은 한 달의 휴가 동안 현실에서 해야만 했던 일들을 잠시 접고 어쩌면 무심했던 것들을 되새기며 고통을 겪고 또 덜어가고 계시겠지. 한 달의 휴가, 어머니 살아계실 적 일찌 감치 주어진 것이었다면 두 사람의 여름휴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외국 나들이, 제주 해변 산책, 그마저도 아니면 집에서 선풍기 틀어놓고 함께 수박 먹는 일 정도는 잦았겠지. 나는 망치고 돌아온 여름휴가를 후회했고 누군가는 그마저도벌벌 떨며 현실에 발 담그고 눈치를 봤다. 그럴 필요 있나? 본인에게 주어진 여유라면 절대 후회 없이 써야 한다. 지금은 휴식과 기쁨을 벌기 위해 쓰는 휴가지만 이를 소홀히 하면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을 치유하느라 기약 없는 휴가를 보내게 될지 모를 일이다 .
김소정 월간 인재경영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