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김 다이어리

주말 동안 온 집안을 뒤집어놨다. 심심하면 버리고 청소하는 일이 습관인지라 딱히 또 정리하고 말고 할 물건은 없지만, 이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쓰레기들, 이를테면 불필요한 메일이나 사진 같은 컴퓨터 속 데이터들을 이때쯤 한 번 훑어보며 지우는 일이 매우 중요한 연례행사가 되었다. 좋았다가 나빠진 관계, 잊고 지냈던 소중한 사람,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을 하나씩 되새기며 ‘적어도 어제보다는 가벼운 오늘이 되었다’고 자축하며 새해를 맞이했다. 시무식 때 전사 정리정돈 명령이 떨어진 이후 새해 첫 출근일인 오늘은 종이뭉치, 안보는 책, 낡은 슬리퍼, 가방 등 각 부서에서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로 전쟁터가 따로 없다. 각 층에 한 대씩 비치된 문서 세절기는 덕분에 이른 아침부터 문전성시. 번잡스러운 오전을 보내고 점심시간, 정작 필요한 정리정돈은 따로 있다며 몇몇 모여 떠드는 중이다. “내가 진짜 버리고 싶은 게 뭔 줄 알아? 우리 팀장이야. 마케팅 전문가라고 해서 난 좀 배울 게 있겠다 싶었는데 이건 어디 동네 가게들 프로모션 돌다 온 수준이라니까. 신형 씨, 혹시라도 인사업무로 크고 싶으면 사람 제대로 뽑는 법부터 익히고 배워. 매뉴얼이 다 무슨 소용이야.” “저희 팀장님이랑 경영기획본부장님, 대표님까지 면접보고 뽑으셨잖아요. 저야 공채 신입사원 이력서 골라낼 때나 보지, 직급있는 분들 이력서는 못 보니까 잘 몰랐어요. 문제가 많아요?” “황당 그 자체야. 예전 최 실장님은 좀 까칠하고 예민해서 그렇지 일은 잘하셨다고. 본부로 통합되면서 KPI 기껏 새로 짜더니 실무는 다 엉키고, 사람은 엉뚱하게 뽑아 놓고 갈수록 왜 이러냐? 인성까지는 안 바래도 윗머리로 오는 거면 일을 아는 사람을 들여야지.” 우리 회사에서 유일하게 ‘실’ 단위로 구분되었던 기획실과 마케팅실이 경영기획본부로 통합되면서 몇몇 요직이 물갈이가 되었는데 그 일로 말이 많다. 기존에 계셨던 마케팅실 최 실장님 퇴사 이후 대체할 팀장급 채용과정에서 업무매칭에 큰 오류가 발생한 듯했다. “내 보기에 본인 이력에 기획, 마케팅 관련용어 다 붙여 넣은 것 같아. 실제로 해본 건 브랜드마케팅이나 홍보 쪽인 것 같고, 면접 보면서 그냥 다 할 줄 안다고 했겠지. 근데 우리 회사가 BtoB 제조 영업이 주업 아냐? 소비자광고나 프로모션은 올 사업계획에 들어있지도 않은데 엄한 소리하면서 우리 기존 자료는 아예 접근도 못해. 그래프 이해를 못한다고. 실컷 실무로 다져진 직원들은 안 키워주고 검증도 안된 사람을 뽑아서 역으로 가르치는 꼴 이라니……” 나처럼 말단 사원은 그저 하루하루 배우고 익히는 직장생활이지만 한 분야에서 대리, 과장이라는 직책을 달면 얘기가 좀 달라지는 것 같다. 우리가 ‘실무, 현업’이라고 일컫는 모든 일들이 사실 그 선에서 많이 이루어지지 않던가. 학생일 때는 기획은 기획, 마케팅은 마케팅 이렇게 단어 그 자체로 단순하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직업의 세계로 들어서고 보니 그 속에는 또 다른 카테고리들이 수없이 존재했다. 마케팅도 세부적으로 나누면 업무분야가 상당히 다양하고, 그 중에는 재무회계 못지않게 수치에 대한 감각과 전문지식을 요하는 부분도 있었다. 마케팅실 막내로 입사해 가장 오랜 시간 근무한 이 과장님은 그 모든 세부적인 내용을 아우를 수 있는 ‘마케팅 통(通)’으로 유명한 분이다. 인성이나 업무 모든 면에서 많은 직원들이 믿고 따르는 선임이기에 그의 답답한 심정을 듣는 이 모두가 격하게 안타까워 했지만 그렇다고 누구 하나 속 시원한 해결책을 내놓을 수는 없었다. 담당업무는 물론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꿰차고 있는 사람을 위로 올리지 않고 새로운 인물을 팀장으로 영입한 이유는 뭘까? 장기근속자를 선호하고 신뢰한다 하면서도 기업의 생리라는 큰 틀에서 보면 ‘오래된 사람, 고인 물’이라는 또 다른 그림자를 마주하게 된다. 물론 특이사항이 없는 한 자신의 자리에 오래 머물면서 안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긴 하나, 문제는 그저 그런 사람들 속 ‘능력자’를 왜 몰라보냐는 거다. “신형! 뭐해? 회의실 세팅해뒀어? 점심 먹고 바로 시작한다고 했잖아.” 얘기가 길어진 탓에 깜박하고 회의준비를 못했다. 작년 하반기부터 준비한 인사평가제도 개선 5단계에서 올 2월까지는 3단계를 마무리 지어야 한다. 우리 팀 대리직급이 공석이라 회의록 작성을 위해 나도 참석해야 하는 회의다. “역평가제, 부서연계평가제 둘 다 말이 안 된다니까. 그거야말로 친한 사람 높은 점수 주기 딱 좋지 실제로 제대로 된 업무능력 평가가 되겠어? 잘못하면 불필요한 말만 늘고 서로 눈치 보여서 일도 제대로 못해. 업무적으로 지적하고 싶어도 자기 인사점수 깎일까 어디 말 한 번 제대로 하겠어?” “수평적 관계, 업무책임자 힘 실어주기 다 좋다 이거야. 근데 평가는 엄연히 수치로 나와야지. 지금 수준에서 부서장 평가항목 추가하고 비율만 좀 낮추는 선에서 끝내자고.” 우리 본부장님의 인사평가제도 개선 3안의 여러 아이디어를 놓고 각 부서장들은 입을 모아 반대다.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평가하고 업무와 서로 관련된 부서끼리 상대방을 평가하는 일이 객관적이고 정량적으로 이루어지긴 힘들겠지만 그렇다고 지금처럼 부서장 평가비중이 높은 게 과연 합리적인 걸까? 기존 안건을 좀 더 다듬어 다시 얘기하자는 선에서 회의는 마무리됐다. 현재의 인사평가는 부서별, 개인별 KPI 달성도와 부서장의 평가점수로 이루어진다. 영업처럼 업무성과관리가 수치로 명확히 나오는 부서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부서장 평가점수에 크게 좌우되어 왔다. 이 과장님이 경영기획본부 팀장으로 승진하지 못한 사유가 바로 이 인사평가제도 때문이라고 많은 직원들이 말한다. 워 낙 직설적으로 말하는 성격이라 직속상사에게도 거침없으셨겠지. 특히나 현재 경영기획본부장님과는 오랜 앙숙이라니, 1차 권한자인 그에게 점수를 깎였다면 어쩔 수 없는 결과였다. 송구영신하자며 새로운 사람을 뽑고, 자리를 정리정돈했다. 그러나 정작 새롭게 시작되어야 할 일들은 새해가 되어도 늘 묵은 숙제로 남는다. 새로운 사람이 ‘짠’하고 나타나 활력을 불어넣는 것도 좋지만 우선은 현 조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의 능력을 제대로 평가하고 인정해주는 것에서부터가 출발점이 되어야겠지. 그물꼬를 트는 일을 올 해 우리 부서가 꼭 해내야만 하기에 본부장님의 어깨가 어느 때보다 무겁다. “새로운 거 얻자고 묵은 걸 덮거나 버리는 게 능사는 아니지. 어쩌면 우리가 오래되었다고 판단하는 것들이 실은 편견일 수도 있고 말이야. 자, 우리의 미션은 하나다. 묵은 것에서 새로움을 찾아내고 만드는 일, 그걸 우리 부서가 해내는 거야! 송년회를 못한 경영지원본부의 신년회 회식자리, 본부장님의 의미심장한 말씀으로 우리의 진정한 2015년도가 시작되었다. 직장의 새로운 시작을 만드는 인사팀의 일원으로서 나도 무거운 책임감으로 힘차게 건배! 김소정 월간 인재경영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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