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민의 세상보기

세상의 ‘장그래’들이 그렇게 원한다는 그 ‘정규직’이라는 게 뭘까? 다들 정규직만이 살 길이고 또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게 과연 그럴까? 모든 걸 다 안다는 네이버에 물어봤다. “사용자와 직접 계약을 하고, 전일제 근무를 하고, 계약기간의 정함이 없어서 정년까지 고용이 보장되는 근로자”라고 대답을 한다.여기서 핵심은 ‘정년까지 고용이 보장’이라는 구절에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고용이 보장’이라는 개념은 언제부터 생긴 것일까? 조선시대의 관료? 과거에 합격하면 정년까지 무조건 근무? 수시 해고와 귀양 남발의 역사를 보면 그건 아닌 것 같다. 그러면 언제부터 한 번 고용하면 해고하지 못한다는 그런 ‘기대’가 생긴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일본 봉건시대의 사무라이 제도를 종신고용의 원조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것도 아니다. 정말 어이없게도 기업이 직원들을 함부로 해고할 수 없다는 그 개념은 1938년에 고노에 내각이 발효한 ‘국가총동원법’에 따라 일반에 보급된 개념이라는 게 정론이다. 결국 정규직 제도는 침략을 일삼던 일본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보급된 시스템이라는 말이다. 당시에 정신 나간 일본 장군들이 쓸데없이 여기저기 전쟁판을 벌이고 다니다 보니 그걸 뒤에서 수습하고 지원해야 하는 기업과 관료들은 숨이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래서 급여수준을 대폭 낮추고 식량과 생필품은 배급체제로 바꾸었다. 모든 물자는 전방으로 보내고 모두가 내핍생활을 했다. 그런 상황에서 국가는 함부로 직원을 해고하면 안 된다는 논리를 기업에 강요했다. 내핍 생활과 고용안정을 교환한 일종의 국가사회주의였다. ‘국가총동원’이라는 당시 환경에서는 그래도 상당히 일리가 있었다. 직원 입장에서도 다른 곳에 갈 수도, 또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그런 정규직의 개념이 해방 이후에 한국사회에 지속적으로 이어져 왔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변변한 기업이나 공장이 없었으니 아예 그런 개념도 없었다. 그러다가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면서 기업이 생겨나고 공장이 생겼다. 그리고 정부는 인건비 경쟁력을 위해 노조활동을 통제하고 급여수준을 철저하게 묶었다. 수출경쟁력을 위해, 경제개발을 위해 낮은 수준의 급여와 열악한 근무여건과 고용안정이 또다시 교환되었다. 그렇게 우리에게 정규직이라는 개념이 우리 사회에 서서히 그리고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정규직’이라는 단어가 IMF 외환위기 이후에 ‘구조조정’이라는 단어와 더불어 우리 국민들에게 익숙해졌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정규직은 대칭되는 반대말이 있어야 유효할 수 있는 개념이다. 게릴라가 있어야 정규군이 정의되듯, 비정규직이 있어야 정규직이 뭔지 이해가 가능하다. 서구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들어오고 고용의 유연성이라는 개념이 소개되면서 비정규직이 생기고 거꾸로 기존의 경직된 고용구조의 정규직이 인식된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답답한 것이 그것이다. 환경이 바뀌었다. 지금은 전시도 아니고 열악한 근무여건도 아니다. 그리고 글로벌화로 문화가 개방되어서 경쟁의 영역은 넓어졌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이 연봉은 엄청나게 많이 달라고 하고, 자기 개발은 도통 안 해서 외부의 가능한 대안들보다 경쟁력이 형편없이 떨어졌다. 그러면서 법과 조합의 뒤에 숨어서 해고를 하지 말라고 한다면? 이건 무임승차의 수준을 떠나 비겁한 짓이다. 자꾸만 기업이 그런 국면에 몰리고 글로벌 경쟁에 치이면 ‘무서운 정규직’을 피해 비정규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현상의 결과가 지금의 비정규직의 양산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이런 생각도 해본다. ‘이 세상의 비정규직은 일부 정규직이 가진 탐욕이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 없는 기업과 공고한 정규직들의 연합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식민지’가 비정규직이 아닐까?’ 정규직의 꿈? 그것은 월급을 많이 받고 싶다는 것일까? 아니면 내가 회사에서 필요가 없어져도 해고하지 말고 계속 월급을 달라는 것일까? 전자라면 그래도 괜찮지만 후자라면 걱정이 된다. 세상의 기술과 경쟁의 방식이 바뀌는 속도가 더 빨라지는 국면에서 더 걱정이 아니 될 수 없다. 일본에서 ‘사축(社畜)’이라는 단어가 유행했다. 집에서 키우면 가축(家畜)이라 부르고 회사에서 키우면 사축(社畜)이라 한다. 섬뜩한 용어가 아닐 수 없다. 일본에는 모든 것을 알려주는 네이버가 없다. 그래서 위키디피아를 들여다봤다. “자신이 근무하고 있는 회사에서 길러지는 것에 익숙해져서 자신의 의지와 양심을 방기하고 노예가 되는 샐러리맨의 상태를 야유하는 단어”라고 나와 있다. 영어로 번역하면 ‘Wage Slave, 임금노예’쯤 되겠다. 주인 눈치만 살살 보면서 꼬리를 흔들고, 때 되면 주어지는 사료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는 동물을 우리는 ‘가축’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상사 눈치만 살살 보면서 생각도 주관도 없이 시키는 일만 하면서 정기적으로 반복되는 월급날에 모든 신경을 빼앗기는 정규직이 있다면 그게 ‘사축’이 아니고 또 무얼까! 우리보다 고용이 유연성이 더 부족한 일본에는 그런 게 문제가 되나 보다. 홀푸드-마켓을 창업한 존 매키(John Mackey)가 이런 말을 했다. “사람이 먹지 않으면 살 수 없고, 기업이 이익을 내지 못하면 생존할 수 없다. 그러나 사람이 먹기 위해서 살지 않는 것처럼 기업 또한 이익만을 위해서 존재하지는 않는다.” 그야말로 깔끔한 정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사담당자라면 여기서 한 걸음 더나아가 생각을 해봐야 한다. 누군가가 “당신! 회사에 왜 나오는가?”하고 느닷없이 돌직구를 던진다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쉽게 대답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다 궁여지책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라는 궁색한 대답을 내놓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은 대답과 자못 차이가 있다. “월급 받아서 먹고 살기 위해서!”, “월급 받아서 처자식 건사하기 위해서!” 따지고 보면 그게 ‘기업의 존재목적이 이익창출’이라는 논리와 뭐가 다른가? 월급날 바라보면서 상사 눈치 보며 사는 거! 느닷없이 잘리는 리스크를 피하기 위해서 눈치 보기 백단이 되는 거? 장그래가 그렇게 원한다는 그 정규직? 그게 살짝 삐끗하면 ‘사축’으로 가는 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가능하면 정규직을 뽑지 않고 비정규직을 자꾸 뽑으려는 건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인 것 같다. 그런데 그 배경에 미래환경의 변화를 예측하기 어려우니 고용을 유연하게 가져가겠다는 생각만 있는 것일까? 아무 생각 없이 아무 목적 없이 회사를 다니는 그 정규직들 때문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래도 그 정도라면 괜찮다. 그 잘난 정규직들이 ‘사축’의 단계를 넘어 ‘좀비’의 단계로 가는 것은 도저히 참기 어렵다. 좀비?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특별한 이유를 모른 채 퀭한 눈으로 지하철을 탄다. 영혼이 없이 말이다. 그리고 그 영혼은 회사가 가까워질수록 농도가 더 떨어진다. 그리고 회사라는 곳에서 하루 종일 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이해하려 노력도 안 하면서 뭔가를 한다. 그들은 본능에 의해서 움직인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가까워지면 영혼의 농도가 짙어진다. 그리고 그 다음날 다시 영혼이 없는 상태로 회사란 곳을 간다. 그렇게 영혼이 없는 상태로, 정년이 다가올 때까지 ‘기한의 정함이 없는’ 생활을 무한 반복한다. ‘어차피 회사에서 해고는 함부로 못하니까 출석만 열심히 하자!’ 이게 맞는 건가? ‘회사 좀비’가 정말 무서운 것은 동료에게 그리고 후배에게 쉽게 전염이 된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좀처럼 죽일 수가(내보낼 수) 없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신입사원 시절 ‘내가 회사에 제공하는 가치보다 회사에서 주는 연봉이 더 많다고 생각되면 미련 없이 그만둔다!’는 원칙 하나를 세워두었다. 겁도 없이 세운 그 원칙 때문에 진짜 여러 번 그만둘 뻔했다. 미안하게도 우리 회사는 직급과 연봉을 계속 올려 주었고 나는 추격해오는 그 무서운 연봉에 추월당하지 않기 위해서 치열하게 달아나야 했다. 그 덕분에 나는 조금은 영혼이 있는 직장생활을 해온 것 같다. 그런 게 지금의 정규직들에게 필요한 것 같다. 지금의 기업은 구성원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단계에 머물러서는 곤란하다. 이제는 구성원들에게 꿈을 보여주고 그것을 이뤄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HR 담당자들은 구성원들을 사축(社畜)으로, 영혼이 없는 좀비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서서 HR 담당자들이 구성원의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회사가 나를 해고하지 못하도록 법적으로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아까워서 나를 놔주지 못하도록 실력으로 옭아매게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HR을 하는 사람들은 임직원들의 머릿속까지도 책임지는 역할을 해야 한다. 청년실업률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하고 있고, 전체 임금노동자의 절반 가까이가 비정규직인 이 마당에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고 생각하시는가? 미안하게도 나는 ‘임원’이다. 임시직원의 약자!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고 하면 나오지 말아야 하는 극강으로 고용이 유연하다는 그 ‘임원’ 말이다. 정말 열심히 일했더니, 잘했다고 보상으로 정규직이 아닌 ‘임시 직원’의 신분이 주어졌다. 샐러리맨들의 꿈이라는 임원은 아이러니하게도 ‘도로 비정규직’이다. 그래! 나도 이참에 회사가 함부로 자르지 못하도록 임원노동조합이나 하나 만들어볼까? 4년짜리 계약직 국회의원의 가입도 받아주면서 말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사축’이 아니라 ‘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우리, HR 담당자들은 임직원들이 야생의 ‘사자’처럼 꿈꾸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게 바로 진짜 장그래들의 꿈이 되어야 한다. 전영민 롯데인재개발원 인재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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