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김 다이어리

이런저런 팀 프로젝트로 일주일에 기본 3일은 야근을 하다 보니 몸이 많이 허해진 탓일까, 지독한 감기로 아침 출근이 그야말로 지옥 같다. 노약좌석 앞에서 비실거리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연세 지긋하신 할아버지가 지팡이로 가방을 툭툭 치며 옆에 빈자리를 가리키신다. “출근길에는 괜찮아. 노인네들 타면 양보하면 되지. 힘들어하지 말고 잠깐이라도 앉아서 가 아가씨.” 진작부터 내 눈은 빈 좌석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람들로 꽉 차 발 딛고 서있기도 힘든 출근시간에 어느 누구도 앉지 않는 빈 좌석이라니, 외국인들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한국의 넘치는 웃어른 공경과 눈치 문화가 새삼 대단하다. 피곤한 몸 상태보다 남들 눈에 어떻게 보일지를 걱정하는 나도 어쩔 수 없는 한국사람. 미소로 대답하고 쓴웃음을 삼킨다. “진짜? 대박 부럽다. 내 주변엔 주식으로 재미 보는 사람 없던데 그 팀장 운도 좋다.” “부럽긴, 회사에서 일은 안하고 주식이며 부동산이며 사적인 일 하는 게 뭐 자랑이라고 자기 입으로 떠벌리고 다니냐. 책상에 앉아서 주구장창 주식만 보니 얻어 걸린 거지. 원래 돈 있는 집안인지 차도 외제차에 가방, 시계 죄다 명품이야. 허세만 차서는… 얼핏 들었는데 일 따오는 것도 다 연줄이라던데 뭐. 참 세상 편하게 사는 사람이야.” 부부로 보이는 남녀가 출근길부터 남자 직장상사 뒷담화를 꽃 피우고 있다. 나는 서있을 기력도 없는데 뭐가 그리 영양가 있는 얘기라고 저렇게까지 열을 올릴까. 그들의 이야기에서 비판의 소재가 될 수 있는 사실은 ‘책상에 앉아 일은 안하고 주식만 본다’는 것 정도. 그 이외에는 지극히 개인의 사적인 부분이다. 집안배경, 차, 명품 그런 것들이 그저 세상 편하게 사는 한 사람으로 몰아세울 이유가 되나? 굳이 이야기 속 팀장을 옹호할 필요는 없지만, ‘만약 내가 노약좌석에 잠깐 앉아 휴식을 취했다면 단지 그 이유 하나로 이 객실 안 누군가에게는 개념 없는 젊은이로 낙인찍히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그 분도 좀 억울한 심정일 것 같다. 감기약으로 몽롱한 오전을 보내고 집에서 싸온 죽으로 점심을 대신하고 자리에 엎드려 쉬고 있는데, 재무팀 직원들이 일찌감치 식사를 끝내고 와서는 오늘 아침 출근길의 한 장면을 재현하느라 아까운 휴식시간을 날리고 있다. “영업 2팀 저번 달 실적 봤어? 매일같이 어울려 당구 치고 술 먹더니 바닥을 쳤더라. 거래처에서 클레임도 많다던데 일 처리는 하고 있나 몰라. 한 대리는 그저께 돌비치킨에서 여자들이랑 어울리고 있더라고. 우리 회사 직원은 아닌 것 같던데…” “한 대리 여자 친구 있잖아? 자식, 인물 반반하니 여기저기서 축제네. 영업 1팀 희연 씨랑은 단둘이 등산도 갔다고 말 돌더라고. 하여간 인물이야 인물.” “어머, 한 대리님 그런 분이셨어요? 바람기 있는 남자 정말 싫은데. 여자 친구분 안됐다.” 이어지는 얘기를 듣고 있자니 나도 모를 화가 치밀어 올라 키보드를 확 밀치며 일어났다. 내가 있는 걸 몰랐는지 웃으며 얘기를 나누던 세 명이 화들짝 놀라 동시에 나를 본다. “어, 신형? 밥 먹으러 안 갔어? 안색이 안 좋다. 그럴수록 잘 챙겨먹어야지.” ‘무슨 연예부 기자님들이세요? 남 일에 왈가왈부하느라 일은 제대로 하는지 몰라! 제발 좀 본인 살림살이에 집중하세요!’라고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그들에게 나를 욕할 기회를 선물할 수는 없어 또 어설픈 미소를 날리며 쓴웃음을 삼킬 뿐이다. 나라고 특별할 건 없다. 아는 사람과 관련된 일을 보거나 내가 당한 것이 있으면 기억해뒀다가 삼삼오오 모였을 때 이야기보따리를 풀기도 하고, 특히나 우리 팀장님의 억지, 일 못하는 동료, 진상 거래처를 상대할 때는 동료, 친구, 부모님 할 것 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내 억울함을 토로해야 스트레스가 풀린다. ‘아니 뗀 굴뚝에 연기 날 일 없으니 욕을 듣는 당사자의 잘못이 분명 있겠지’하며 우리가 나누는 모든 뒷담화를 합리화했다. 하지만 회사생활을 이어오면서 나에 대한 그리고 남에 대한 어설픈 이야기들이 만드는 불신과 오해가 회사뿐  아니라 개개인의 삶에 얼마나 마이너스로 작용하는지를 깨닫기 시작하면서 요즘은 오히려 남 얘기를 꺼내거나 듣는 것 자체가 더 큰 스트레스가 되고 있다. 작년에 여기저기 떠벌린 팀장님에 대한 험담이 돌고 돌아 결국 팀장님 귀에 들어가 호되게 한 소리 들은 것도 그렇고, 최근에 타 부서와 점심 먹는 자리에서 그 자리에 없는 직원 얘기를 꺼냈다가 졸지에 ‘입이 싼 신형’이라는 내 뒷담화를 돌려받은 어이없는 경우도 그렇다. 사람의 한두 가지 결점 또는 잘못으로 자칫 그 사람의 인격과 삶 전체를 오해하거나 부정해버릴 수 있음을 매일같이 보고 듣고 겪고 있는 우리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서로 창과 총을 겨누는 걸까? “이게 뭐예요?” “무슨 행사라고 앞에서 나눠주더라. 누구 고생시키려고 감기가 이리 길어지냐? 오늘은 무조건 일찍 들어가서 쉬어라. 몸에 좋은 것 좀 먹고! 참, 음료수는 내 돈으로 산 거다.” 꼬장꼬장 우리 팀장님이 작은 선인장 화분과 비타민 음료를 건네신다. 입사 초반은 정말 이름만 들어도 질색했던 분이다. 그때 감정 그대로라면 아마도 ‘얻어 온 화분이랑 비타민 음료가 뭐냐? 쪼잔하게. 하긴, 비싼 밥을 사줘도 싫다’라며 누군가에게 이야기꽃을 피웠겠지. 여전히 싫은 점 투성이지만 장, 단점을 피하기보다 정면돌파를 시도했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빛을 보는 모양이다. 나와 연관이 되거나 아니면 아무 관련이 없어도 매일같이 남들 이야기 속에서 살고 있다. 누가 뭘 했고, 집을 사고, 아들이 사고뭉치고, 남편이 무능하고... 그러나 그런 것들이 지금의 나, 앞으로의 자신에게 먼지만큼의 값어치라도 있는가. 남 얘기는 결국 피었다 지는 한 철 꽃이다. 직장이라고 해서, 힘든 업무, 사회생활이라는 핑계로 남을 통해 스트레스를 풀기보다는 내 삶을 더 잘 가꾸는 일에 올 봄의 에너지를 쏟아보는 건 어떨까. 김소정 월간 인재경영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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