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김 다이어리

“내 탓이야? 직원들이 일하면서 쓰고 먹는 걸 나더러 어떻게 줄이라고. 아예 구매금지령을 내리던지 하시지.” 구매팀은 오전 내내 이어진 대표님과의 회의로, 아니 사실 그대로 말하면 장시간 계속된 대표님의 훈계로 팀 분위기가 말이 아니다. 지난해 연말부터 영업이익이 하락세를 긋더니 이번 달은 굵직한 거래처가 떨어져 나가면서 대표님이 회사 내부 살림 다지기에 직접 나섰는데, 그 불똥이 오늘 구매팀으로 튄 것이다. 물론 대표가 내부 살림 다지기에 개입해 그것이 일정부분 성과로 나타난다면야 박수 받을 일이겠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직원들을 못살게 구는 것 외에 눈에 띄는 성과를 기대하기 힘들다는 게 우리 직원들의 보편적인 생각이다. 영업부서야 실적이라는 업의 굴레가 있다지만 경영지원부서 중 하나인 구매팀은 조금 황당하고 억울한 이유로 얻어맞고 있으니 모두가 안쓰럽게 바라보며 앞으로의 상황을 지켜볼 참이다. “원부자재나 금액이 좀 큰 건들 관리에서 놓친 부분이 생긴 건 그래, 화나실 만하지. 가뜩이나 영업실적도 저 모양인데 우리라도 꼼꼼하게 보고 금액차이 줄이는 건 당연하다 이거야. 근데 진짜 억울하다. 실상 우리 팀에서 깨먹은 건 하나도 없어. 내가 지난달에 외제부품 하나 국산 걸로 찾아내서 거의 천만 원 세이브했잖아. 그런 건 알아주지도 않고 말이지. 고작 직원들 쓰는 종이, 믹스커피, 종이컵, 간식비 이런 게 많이 나간다고 저 난리를 치시니...... 회사 사정 아니까 설 상여 없었던 것도 우리 다 이해했잖아. 직원들만 회사 생각하면 뭐하느냐고, 정말 너무하다 너무해.” “사무실에서 나가는 비용으로 속 좁게 그러실 분은 아니잖아? 아침도 챙겨주는 회사인데,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 원래는 사무실에서 나가는 집기비용이나 임직원들 대상의 소모품, 이를테면 사무용품, 종이컵, 믹스커피 등의 구매는 인사총무팀에서 담당했었는데 조직개편 이후로 회사와 관련된 모든 구매행위는 구매팀에서 전담하게 되었다. 우리 팀 업무일 때는 어떤 물품이 되었든 신청한다고 해서 다 사주거나 하지 않고 기간을 두어 구매수량을 조절하는 등 나름의 노하우로 비용을 맞췄었는데 구매팀은 본래 제품생산에 필요한 원부자재 구매를 위주로 큰 돈을 다루다 보니, 내부에서 직원들을 위해 쓰는 금액은 소소하다고 생각해 팀 권한으로 생색을 좀 냈던 모양이다. 아무리 적은 금액이라도 기존에 꾸준히 나가던 액수가 갑작스레 두 배, 세 배가 되었다면 요즘같이 벌이가 시원찮은 회사 사정에 비추어 보았을 때 대표님 눈에 거슬리는 건 당연지사 아닌가. “근데 대리님, 저희가 직원 수가 갑자기 늘어난 것도 아니고 그쪽 비용이 크게 올라갈 특이사항이 없는데 도대체 비용이 얼마나 더 나왔길래 저러시는 거예요?” “나도 그게 미스터리야. 일단은 커피믹스랑 녹차 같은 티백 제품이 거진 두 배고, 지류 값도 그렇고 전반적으로 많이 쓰긴 썼더라고. 그래 봤자 큰 돈은 아니지만.” 구매팀 최 대리님의 열띤 항변을 듣고 자리로 돌아온 나는 지난 몇 달간 직원들의 사내 소비생활을 떠올려봤다. 탕비실, 휴게실에서 우리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커피전문점의 커피에 길들여진 입맛이지만 아침에 출근하면 마시든 안 마시든 믹스커피도 일단 타고 본다. 자리에 올려놓은 종이컵만 해도 오전 시간만 두, 서너 개. 개인용 물컵은 물을 마시는 용도로 쓰고 그 나머지는 여전히 일회용품에 의존하고 있다. 최종데이터가 나오기 전에 일단 출력부터 해서 보거나, 굳이 뽑지 않아도 되는 자료도 습관처럼 프린트한다. 이면지 사용이 활성화되긴 했지만, 이면지 자체가 나오지 않도록 노력하는 모습은 여전히 찾아보기 힘들다. 기혼자들이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래도 가정, 자녀가 있는 이들은 사무실이 제공하는 물품에 대한 사용빈도가 높은 편이다. 지난 달 어느 금요일 퇴근 무렵, 탕비실 불을 끄려고 들어갔는데 CS팀 명희 과장님이 회사 종이봉투에 커피믹스와 녹차 티백을 담고 계시는 걸 보고는 서로 민망한 웃음을 지었었다. “어머 신형 씨, 아직 퇴근 안 했어? 내가 이런 거 잘 안 먹는데 내일 아파트 반상회를 우리 집에서 하거든. 먹지도 않는 걸 사긴 그렇고, 필요할까 싶어 몇 개만 가져가려고. 괜히 민망하네?” 우리 본부장님도 딸아이 과제라며 종종 자료를 프린트해서 가져가시고, 나도 피아노 악보나 요리레시피를 출력해간다. 다른 사람의 모습뿐만 아니라 직장에서의 내 생활만 따져 봐도 회사물건을 내 것처럼 아끼고 소중히 한 적은 없으니 부끄럽기는 마찬가지. 오랜만에 대학 동창들이 모여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오늘 있었던 얘기를 꺼내보았다. “큰 돈 아니잖아. 그리고 내 꺼 아닌데 굳이 신경 쓰면서 아끼고 자시고 할 필요 없지. 그런다고 회사가 알아주냐? 짠 내 월급에 비하면 24시간 쓰고 또 써도 모자라.” “우리 회사는 얼마나 끔찍하게 챙기는지 몰라. 복사기 앞에 ‘개인용도는 장당 100원, 컬러는 300원’ 이렇게 붙여놨어. 양심껏 하란 얘기지. 커피믹스? 그런 건 아예 없어. 정수기만 있으니 필요하면 개인이 사먹으란 거지. 너네 회사 대표님은 왜 실컷 해주고 욕을 드시는지 모르겠다?” 회사가 직원들을 위해서 특별히 복지라는 항목을 만들어 대우 해주지 않는 이상, 직원들 역시 특별히 회사를 위해서 아껴야 할 의무는 없다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그나마 회사의 비품, 소모품들도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면 쓰는 거지, 그마저도 여유가 없는 회사가 대부분이란다. 그렇지만 내가 경영을 한다고 가정해보면 이런 생각도 든다. 사무실의 물건들은 기본적으로 회사의 사업활동을 위해 구비하고 소모되는 것들인데, 그걸 직원 복지의 일부라는 명목으로 사적인 용도에 사용하는 건 조금 잘못된 습관이 아닐까? 우리가 회사의 일원으로 제 역할을 하고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지킬 건 지키는 정직한 문화도 정착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임금은 제자리, 일자리는 마이너스, 경기는 말할 것 없이 점점 더 바닥으로 내려가는 요즘, 회사의 벌이가 시원치 않으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도 직원들이다. 조금 힘든 시기에는 함께 노력하고 아끼려는 마음가짐으로 다시 출근이다. “사장님! 회사 물건이라고 막 쓰지 않고 소소한 것이라도 정당하게 사용하고, 아껴 써볼게요. 그러니 저희를 위한 복지와 급여도 꼭 잘 부탁드립니다!” 김소정 월간 인재경영 객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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