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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휑하다 휑해. 여긴 또 수장이 자릴 비웠네. 휴가 날짜 조정 좀 하라니까 거 참, 일을 하자는 거야, 말자는 거야.” 영업총괄책임이사 ‘투투(그의 얼굴, 성격이 여실히 반영된 별명이다)’는 아침부터 우리 부서 앞에서 뒷짐을 지고 최대한 썩은 표정을 지으며 대사를 읊고 있다. 아마도 우리 본부장님이 안 계신 틈을 타서 본인의 계략을 마음껏 펼치려는 모양이다. 가만 보고 있자니 열불이 나서 나도 환영인사 한 마디 건넸다. “안녕하세요, 이사님. 휴가는 잘 다녀오셨어요? 지난주에 보라카이 가셨다고 들었는데... 외국 물이 좋긴 좋은가 봐요. 분위기가 확 달라지셨어요. 저희 본부장님 작년 이 맘 때 모친상 치르시고 첫 제사라 부득이 휴가 쓰셨어요. 보통 때 같으면 본인 휴가는 제일 마지막에 쓰셨을 텐데... 급한 일 있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최대한 도와드릴게요, 이사님." “누가 본인 휴가 쓰지 말래, 직원들 휴가일정 좀 조정해서 사무실 분위기는 적당히 만들어야지. 어험... 이래가지고 8월은 공친다고 공쳐. 대표님 계신가? 커피 두 잔 가져와.” 자기 부서 사람들이나 챙길 것이지 왜 잘 돌아가는 부서에 참견인가 하면, 임직원들 사이에 신임이 높기로는 우리 본부장님이 첫번째인데 사사건건 자기와는 반대되는 의견을 내놓고 일을 끌고가니 그 고약한 성질머리에 어떻게든 험담에 흠집을 내려는 수작이다. 본부장님이 계실 때도 가끔 도발인데 부재중이실 때는 오죽하랴. 다들 속으로 욕하고 원래 그런 사람이니 하며 넘기지만 욱하는 내 성격에 지푸라기라도 던져야 마음이 진정된다. “신형, 아직은 괜찮아도 곧 들통난다. 이사님이야 어쩌다 한 번 너를 보니까 잘 모르시겠지만 네 표정, 말… 우리는 훤하다고 숨죽이고 할 일 해. 다 상대하고 어떻게 사냐. 커피나 준비해.” 다 알지만 나서는 법 없는 팀장님 밑에서 내가 괜히 설쳐봤자 어린애 장난이다. 껄껄거리며 대표님 비위 맞추느라 바쁜 투투의 앞에 커피를 내려놓고 나오는 내 신세가 처량할 뿐. 다른 회사랑 직접적으로 비교해본 적은 없지만 CFO로서 내부 조직, 살림뿐 아니라 대표이사의 선하고 충실한 조언자, 직원들의 아버지로 이렇게 역할을 잘 해내시는 분은 없다 싶을 정도로 우리 본부장님의 존재감은 엄청나다. 올해 휴가일정도 본부장님의 책임 아래 이루어진 변화였다. 보통은 임원급이 원하는 날짜를 먼저 빼고 직급 순으로 조절해서 부서 내에서 공석이 겹치는 일이 없도록 하지만, 우리는 일차적으로 각자가 원하는 휴가일정을 모두 정리해서 그에 맞춰 우선순위의 일을 재분배하고 정, 부 책임자 선에서 업무에 지장이 없도록 조정했다. 일의 일정상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80% 이상이 본인이 원하는 날짜에 휴가를 쓰다 보니 오늘 같은 날은 공석이 좀 많지만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 ‘자리에 앉아있어야만, 야근을 해야만 일을 제대로 한다는 고리타분한 생각’을 왜 정당한 휴가를 쓰는 일에도 똑같이 적용하는지, 투투는 참 발전하기 힘든 사람이다. “거기도 왔다 갔어? 우리는 아주 죽치고 앉았다 갔다. 막말로 회사 창립기념일에 다 쉴 때 무슨 문제 있었냐고. 직원들 휴가 겹쳐서 하루 여유롭기로서니 그게 지네 영업에 무슨 지장을 준다고 저 난린지. 고객 불만 제대로 처리 못하면 영업사원들만 욕먹는다고 어찌나 으름장을 놓고 갔는지 우리 팀장님은 앞에서는 말 못하고 듣고만 있다가 나중에 완전 폭발했잖아.” “대표님 보시라고 액션놀이 하는 거지. 그렇게 일, 일, 일 하는 사람이 일주일씩이나 외국으로 휴가는 어떻게 갔다 왔는지 몰라! 기찬 씨 얘기 들어보니까 특별히 보고 받거나 밖에서 챙기고 한 것도 없다는데. 하여간에 영업이나 잘 하지, 왜 안에서 어림도 없는 힘 싸움이야.” 고객지원팀에서 한바탕 물을 흐리고 간 뒤의 여파는 상당했다. 출근한 사람은 몇 안 되었지만 다들 여직원이다 보니 말이 일파만파 번졌다. 처음엔 회사를 휘젓고 다니는 투투에 대한 험담으로 시작된 얘기가 끝에 가서는 우리 본부장님에게 화살이 돌아왔다. 그냥 일에 맞춰서 휴가 써도 되는데 괜히 별 소득도 없이 욕만 듣고 더 피곤하게 되었다나 뭐라나, 나는 그저 황당했다. “모자라도 한 참 모자라. 기껏 잘 해주려고 머리 쓴 사람한테 그런 소릴 하면 어쩌냐고. 투투만 신났네. 엄청 으쓱하겠어. 대표한테는 또 얼마나 자기 유리하게 이야기를 만들겠어. 직원들이 휴가 겹치게 써서 더 힘들어했네, 일이 꼬였네 참 안 봐도 비디오다.” 아니나 다를까, 본부장님이 복귀하신 그 날 대표님이 바로 호출하셨다. 앞뒤 정황이나 분위기로 보아 최 대리님의 예상이 적중한 모양이다. 본부장님은 전 직원 여름휴가 일정표와 부서별 주, 월 단위 업무보고서, 해당 기간 동안의 고객클레임을 모아 하나의 장표로 정리하라고 팀장님에게 지시하셨고 나에게는 별도로 올 여름휴가 일정에 있어 개인적인 의견을 물을 수 있는 무기명 설문 문항을 만들어 인트라넷에 공지하라고 하셨다. 나는 열 개의 항목으로 3일간 설문을 받았고 응답률은 90%에 조금 못 미쳤다. 그냥 넘어가면 될 일을 왜 본인답지 않게 발끈하셔서 크게 만드시는지 모르겠다며 한 팀장님은 걱정에 걱정을 하셨지만, 나는 분명 그러실 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고 따랐다. 그 결과는 9월 초 전사교육시간에 발표할 예정이다. 퇴근 전, 본부장님으로부터 온 한 통의 메일. - 누군가의 나쁜 행동, 직원들의 불만, 우리는 다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옳다고 생각하고 만들어낸 변화를 지키는 일이다. 우리가 복지라고 만든 것 중에 직원들을 편히 쉬게 하는 휴가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그 휴가를 본인이 원하는 때에 쓸 수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나? 옳았다는 걸 증명하고 지키면 된다. 욕을 먹는 부분은 고치면 되지. 안 그래? 다들 힘내라. 본부장이 못나서 미안하다. - 작년 여름, 본부장님은 갑작스레 어머님을 여의시면서 가족과 함께 보내지 못한 휴가가 얼마나 땅을 치고 후회할 일인지를 몸소 경험하셨다. 그 일을 계기로 올해부터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개개인의 쉴 자유를 최대한 지켜주고 싶으셨고 그렇게 실천하셨다. 그런 그 분의 생각, 의지를 누가 욕할까. 직장인들의 여름은 짧지만 소중한 휴가가 있어 즐겁고, 나에겐 그보다 소중한 상사, 우리 본부장님이 계셔서 정말 다행이다. 김소정 월간 인재경영 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