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민의 세상보기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을 보면 우리는 또 한 번의 르네상스 시대를 살고 있는 것 같다. 르네상스는 1000년 동안 지속한 중세를 깨고, 생명과 인간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놓은 혁신적 사건이었다. 그 이후로 인간 문명은 급속도로 발전을 거듭 했는데, 그 배경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거기에는 ‘시민’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자리하고 있다. 중세시절 인간은 죄인으로 태어난 피동적인 존재였다. 죄를 지었으니 고통을 묵묵히 참고 교황과 신부가 지시하는 대로 순응하는 삶을 살아야 했다. 그래서일까? 중세 1000년에 걸친 순응의 기간 인류의 문명과 문화는 한 치도 진보하지 못했다. 그런데 르네상스를 통해서 새롭게 태어난 인간은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인간이었다. 딱 그 지점에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주체적이라는 말은 ‘의식의 능동성’과 ‘행위의 적극성’으로 집약될 수 있다. 윗사람의 지시만 쳐다보면서 순응하는 피동성에서 벗어나 스스로 판단하고 의지를 갖추고 행동하는 인간이라는 말이다. 무모하고 어리석었던 십자군 원정이 끝나고 영주의 성 밑에 부르크(Bourg), 즉 도시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상공업에 종사했다. 영주도 준불법거주민인 이들을 환영했는데 상공업이 발전하면 지역의 세수가 증가하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도시(Bourg)에 사는 사람, 부르주아(Bourgeois)는 자신의 상공업 활동을 위해 더욱 자유로운 성향이 있는 영주 밑에 모여들게 되었고, 저마다 영주들은 이들을 자기 영역에 끌어들이기 위해 각종 유인책을 동원하였다. 소위 중세 말기판 ‘인재전쟁’ 이었다. 세금정책, 규제 완화 등 다양한 인센티브로 그들을 유인했다. 금세 이런 중세의 도시들은 200여 개나 되었고, 도시에 1년만 거주하면 농노에서 해방되어 자유민이 되는 제도도 생겨났다. 농노가 내는 세금보다 시민으로 상공업에 종사하면서 영주에게 내는 세금의 양이 많았기 때문이다. 과거의 농노들은 자신의 가치를 높여가며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렇게 탄생한 근대적 인간, 시민은 자유롭고 주체적인 ‘개인’이었다. 그들은 피동적인 중세적 인간에서 벗어나 과학혁명, 종교개혁, 시민혁명을 가능하게 한 사회적 기술들을 개발했고 근대 유럽의 역사를 주체적으로 만들어 갔다. 결국, 도시와 시민의식은 관리의 대상에 불과했던 피동적인 인간에게 주체성을 심어주었고, 그 주체성은 곧 창의성으로 발현되었다. 그런데 이런 시민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을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유시민들 스스로 자격을 갖추기 위한 지식을 만들어냈고, 고대 그리스의 학문적 성과를 학습의 영역으로 다시 불러냈다. 부르주아들은 대학을 설립하고 자식들을 그곳에 보내서 ‘자격’ 교육을 시켰다. 그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친 것이 바로 ‘자유를 위한 기술(Liberal Art)’이었다. 그게 스티브 잡스의 ‘애플은 기술과 리버럴 아트의 교차점에 서 있다’는 이야기로 연결된다. 장사꾼 인문학자들은 ‘Humanity’라는 단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리버럴 아트’를 ‘인문학’으로 국내에 번역했는데 그것과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스티브 잡스가 꿈꾸던 창의성은 근대 초기의 시민에 뿌리를 둔 것 일까? 아마도 그런 것 같다.

무엇보다 창의성이 중요한 시대, 우리가 한번쯤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 100년 전 포드가 창안한 대량고용사회는 모바일기술로 인해 종말적인 변화를 맞고 있다. 산업혁명이 대량생산에 적합한 포드형 기업을 만들었는데 그런 기업에서는 농노와 같은 규율과 피동성(테일러주의)이 필요했다. 말 잘 듣는 순응형 인재, 철저하게 규율을 준수하는 생산직 노동자가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폭증하는 기업의 필요에 맞추어 국가는 그런 노동자들을 양성하기 위해서 의무교육체계를 만들고 엄격한 규율 아래 학생들을 키웠다. 그런데 컴퓨터기술이 발달하면서 순응형 노동자들이 하던 일 중에 상당부분을 컴퓨터가 대신하게 된다. 이번에는 지식의 중요성이 커지고, 덩달아 ‘지식노동자’의 가치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특정한 전문지식을 배타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인재의 중요성이 커졌다는 말이다. 그때는 그런 인재가 기업에 돈을 벌어주는 핵심적인 키였다. 그래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기업 간의 ‘인재전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이번에는 웹과 모바일이 발전하면서 또 다른 변화가 시작되었다. 사람에게 더 많은 자유가 주어지면서 새로운 유형의 자유시민이 출현한 것이다. 어지간한 지식은 웹에서 금방 찾을 수 있게 되면서 결국, 법률가와 회계사와 같은 전문적인 지식노동자의 일자리가 소멸되고 있다. 지식의 배타적 소유란 게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학교시스템은 여전히 순응형 인재를 양산하고 있고, 학생들은 이런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스펙과 자격증에 매달린다. 여전히 지식노동자의 프레임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기업에 공급되는 인재는 여전히 ‘농로형 인재’이고… 어리석게도 많은 임원은 말 잘 듣는 순응형 인재를 면접장에서 선택하고 있다. 이런 애들이 기업에 들어와 순응하면서 승진하고 성장하면? 기업은 획일성에 빠지면서 망해 갈 뿐이다. 요즘 대학생들이 살아남기 위해서 대기업 취업을 꿈꾸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온갖 자격증을 따고 스펙을 꾸미지만, 그래도 ‘감’이란 걸 가지고 있다. 기업을 선택할 때 ‘펀(fun)’해 보이는 곳을 선호하는 것이다. 기업이 ‘펀’하다는 게 뭘까? 맨날 파티나 하고 노는 곳? 아무리 까진 녀석들이라고 해도 그런 곳을 원하는 건 아니다. 인간이 본연적으로 타고난 자율성과 끼를 발휘할 수 있는 곳. 자기주장을 펼칠 수 있는 곳.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곳…. 정말 최소한으로 봐도 시키는 대로만 해야하는 농로형 피동성에서 벗어난 곳! 그 친구들이 단순히 그런 곳이 좋고 즐거울 거 같아서 선택하는 것뿐일까? 게네들은 요즘 같은 환경이라면 그런 기업만이 장기적으로 살아남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본능적으로 아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주체성을 가지고 기민하게 행동(실행)하는 사람, 자유에 기반하여 창의적인 발상을 하고 그 것을 적극적으로 제기하는 사람, 감성을 가지고 이해관계자들과 공감하고 그들의 변화를 빨리 받아들이는 사람… 결국 창의성에 의해 승부가 갈리는 초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영성과 감성을 가진 인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이건희 회장이 계속 ‘인간미’를 강조했던 것이고, GE가 최근에 리더상의 프레임을 바꾸면서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행동하는 실행과 창의성, 고객 외의 이해관계자들에 대한 공감을 새롭게 추가한 것이다. 결국 지금 시점에서 반발 앞선 인재상은 무엇인가? 인류사회를 움직여 가는 가장 주요한 주체가 된 기업, 그런 기업의 구성원으로서 ‘시민의식’을 가지고 행동하는 인재의 확보와 육성, 그렇게 창의성과 실행성이 넘치는 인재가 자신의 꿈을 실현 할 수 있는 장을 제공하는 기업의 인재관리. 그런 글로벌 시민기업이 지금 우리에게 시급하게 필요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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