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김 다이어리

“콜센터에서 전화나 받는 주제에 뭘 안다고 된다 안 된다 결정을 내려? 내가 지금 이 제품 사서 피해를 본 게 얼만데. 전화 끊고 윗사람한테 직접 전화하라고 해. 안 그러면 내가 본사 찾아간다!”

괴팍하기로 소문난 기술팀 김현철 부장은 아침부터 휴게실에서 전화로 대판 싸움이다. 전문용어로 길게 얘길 하던 그는 고객센터 직원이 제대로 대응을 못하자 극도로 흥분했다.

“못 배워서 그런가? 뭘 알아들어야 설명을 해도 하지. 제품을 아는 담당자가 직접 CS를 하던지 어디서 싼 인건비로 아줌마들 앉혀다가 적당히 넘어가려고 수를 쓰나 그래. 환불로는 어림도 없어. 이것들 제대로 한 번 정신차리게 해줘야지.”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대기업에서 근무하다가 우리 회사가 특수 부품을 개발하던 시기에 큰 돈 받고 이직한 그는 일에 있어서는 완벽주의에 늘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브레인이지만 사람들과의 관계 특히,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최악의 인간으로 소문이 자자하다.그나마 업무 자체가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혼자 고민하고 해결하는 과정이 많기 때문에 웃어넘기지만 가끔 미팅할 때의 모습을 마주하면 정말이지 혀를 내두르게 했다. ‘아니 좋은 대학 나오고 본인 잘나면 저렇게 함부로 해도 되는 건가? 자기 외 사람들은 다 바보 멍청이로 보이나? 이거 뭐 박사 아닌 사람 서러워서 살겠냐고. 김 부장에 비하면 우리 팀장은 천사다 천사.’ 혼자 중얼거리며 자리로 돌아오니 이사님이 급히 찾으신다. “신형, 책 언제 도착해? 내일 오전 교육인데 오늘은 도착해야지.” “네, 오늘 도착할 거예요. 챙기겠습니다.” 요즘은 배송이 워낙 빨라서 하루면 도착하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 않고 하루 일과를 보냈다. 오전은 재무팀과 ERP 점검, 급히 점심을 먹고 밀린 서류들을 처리하다 보니 벌써 오후 5시. 내일 오전 팀장급 이상 사내 교육이 있어 섭외한 강사에게 전화로 다시 한 번 시간과 장소 공지하고 참석자들에게 이메일도 보냈다. 회의실 세팅을 하려고 일어서는데 아차, 책이 아직 도착을 안 했다. 담당 기사님께 전화를 거니 곧 도착하신다고 해서 안심하고 나머지 일을 마무리. 문뜩 시계를 보니 저녁 7시가 다 되어간다. 보통 회사로 오는 택배는 늦어도 오후 2~3시경에는 도착하는데 이상하다. 늦어도 너무 늦는다 싶어 다시 전화를 걸었다. “기사님 저희 미림아이씨3차 807호인데요, 어디세요? 아까 도착하신다고 하셨는데 너무 늦어서요.” “네? 807호...... 죄송합니다. 잘못 배송을 해서 다시 찾아가야 해서요. 혹시 내일 가져다 드리면 안 될까요?” “네? 아저씨 저희 그거 내일 아침 8시에 쓰는 거라 오늘 다 준비해야 해요. 어디로 배송하신 거예요? 무조건 오늘 가져다 주세요!” “아...... 최대한 빨리 배송해드릴게요.” 처음 일하시는 분인지 여하튼 배송실수를 하신 모양이다. 어눌한 말투가 찜찜하지만 어쨌거나 오늘 무조건 받아야 하는 물건이니 불필요한 야근을 감수하는 수밖에. 김밥 한 줄 사먹고 게시판글 읽으며 기다리니 벌써 9시. 슬슬 짜증이 난다. 왜 내 시간을 이렇게 버려야 하는지, 주소지에 물건 하나 가져다주는 일이 뭐 그리 어렵다고 이렇게 피해를 주나 싶어 말이 곱게 안 나간다. “아저씨 어디쯤이세요? 벌써 9시가 넘었는데요. 저 아저씨 때문에 3시간 넘게 기다리고 있어요. 배송해 주셔야 일 마무리하고 퇴근해요.” “아......미림, 미리내3차요. 가고 있어요. 죄송합니다.” “아니요, 미림아이씨3차 807호요. 미림아이씨3차! 이러다 날 새겠어요 정말......” 누구나 하던 일을 실수할 수 있고, 특히나 처음이라면 실수는 어쩌면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정작 내가 보려던 드라마도 놓치고 너무 늦어지게 되니 뭔가 알 수 없는 악한 감정이 복받쳐 올라 전화를 끊고도 계속 씩씩거렸다. ‘한글 안 배웠어? 주소도 제대로 확인 못하면서 어떻게 배송을 하냐고. 나 참, 내가 버린 시간을 돈으로 보상해줄 것도 아니면서. 죄송하면 다냐고!’ 말로 내뱉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열을 내며 곱씹는다. 한 단어, 한 문장, 내가 속으로 하는 생각은 택배 아저씨를 비웃는 짜증 가득한 말들이 아닌가.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며 팔의 잔털들이 바짝 선다. 오늘 아침, 뒤에서 욕하고 손가락질했던 김현철 부장의 태도와 다를 바 없는 지금, 그의 모습이 어느새 내가 되어 있었다. 상대방의 인격 따위는 아랑곳 않는 뒷담화, 부하 직원에게 스트레스 주는 상사, 직원을 하대하는 사장, 월급 공으로 받는 능력 없는 직장인 등 모든 나쁜 것들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늘 발을 뺐었다. 마치 나는 그들과 상관없는 일급수 물고기인 마냥. 그러나 곰곰 돌이켜 보면 나 역시도 남에게 피해를 보거나 조금이라도 안 좋게 엮이면 발톱을 세우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내가 남에게 하는 행동, 남이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행동 역시 자기 자신의 일부라는 것. 그렇게 우리 모두는 서로 너무나 닮았다. “그 부분은 저희가 더 개선을 해야죠. 기술이전 받고 아직 스텝이 익숙하지 않아서 문제가 좀 있는 것 같습니다. 샘플 보시고 연락주세요. 네, 죄송합니다.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어제의 갑이 오늘의 을이 되어 아침부터 바쁜 김현철 부장님. 그렇게 괴팍스러워도 일은 책임감 있게 잘 하시니 무시할 수 없는 사람이다. 자기 분야에 그 정도로 자신이 있고 최선을 다하니까 다른 사람이 제대로 못하면 화날 만도 하지. 그렇지만 지금 본인의 모습을 점검하고 개선할 수 있는 계기를 꼭 찾으셨으면 좋겠다. 당신의 모습이 누군가에게 거울이 되고 또한 스스로에게 돌아오는 부메랑이 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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