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설의 창조경영

국제기구의 ‘권고’가 정답처럼 여겨지던 시절, OECD는 한국의 규제개혁에 대해 이렇게 권고했다. “한국 정부는 ‘빅딜’ 같은 시장 개입적인 정책 대신 전통적인 경쟁정책을 엄격히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OECD는 보고서에 ‘포괄적인 권고사항’ 몇 가지를 추가했다. 양적 목표에 매달리지 말고 규제개혁을 신속히 이행할 것과 △규제영향평가제 도입 △소비자 위주 경쟁정책 추진 △중소기업 보호정책 폐지 등이었다. 2000년 6월의 일이다. 이후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모든 정부가 규제 개혁을 외쳤다. 특히 이명박 정부에 들어서 대통령이 소위 끝장토론을 벌여가며 ‘손톱 밑 가시’, ‘규제는 암 덩어리’, ‘규제는 원수’ 등의 유행어도 쏟아냈다. 정부를 이어가며 십수 년째 ‘규제와의 전쟁’을 벌인 셈인데, 안타깝게도 성공한 정부가 없다. 저성장, 고실업 해결할 돌파구 최근 사례만 봐도 서울반도체가 1, 2공장을 연결하는 180m짜리 터널을 뚫는 데 10년이 걸렸다. 환경, 도시 규제를 뚫는 데 걸린 시간이다. 푸드트럭은 합법화가 2년째지만 전국에 100여 대 남짓만 운영되고 있다. 지자체 허가라는 걸림돌을 넘지 못해서다. 둘 다 박근혜 대통령이 공개석상에서 해결을 지시한 사안인데도 이 정도다. OECD가 1990년대 규제개혁을 화두로 꺼낸 것은 세계 주요국이 성장률 둔화와 높은 실업률 문제에 직면한 원인을 정부 규제로 봤기 때문이다. 지나친 정부 규제가 기업의 적응 능력을 저하시키고 구조적인 실업의 원인으로 작용한다는 결론이었다. 이 분석은 지금의 한국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사실 규제는 한 번 만들어지면 없애기 어렵다. 규제는 처음 나타날 때는 언제나 선한 얼굴로 등장한다. ‘따뜻한 감정에 기반을 둔 규제’(김진국 배재대 교수)가 적지 않은 것이다.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작은 가게를 지켜주며, 동네 빵집을 살리겠다는 온갖 명분으로 만들어진다. 모양만 아름답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정치인이나 관료들은 규제를 많이 만들수록 스스로가 열심히 일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신념까지 갖게 된다. 정치인·관료에 막혀 패색 짙어져 이런 공무원들이 문제다. 해외 반출을 금지한 전자지도의 경우 이를 허가제로 변경해주면서 ‘7개 이상 부처의 합의 아래 허가할 수 있다’는 단서조항을 달아 다시 막았다. 콜버스가 문제되자 허가는 해주되 기존 여객사업자만 참여할 수 있게 한 것을 보라. 점잖게 말하면 공무원들은 시장이 완벽하지 않다고 보기 때문에 ‘규제된 시장’을 만들려는 경향이 있다. 이러니 얼굴을 보지 않고도 전자상거래가 이뤄지는 원리 같은 건 이해도 못 하는 것이다. 온라인 중고차 거래시장을 만들어 매출 300억 원을 올린 벤처를 판매전시장이 없다는 이유로 불법업체로 모는 게 정부다. 이병태 KAIST 교수는 “정부가 시장을 불신하면서 디지털 혁명이 가져온 기술적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하이에크는 “인간이 만든 어떤 것도 시장과 같이 자발적으로 형성된 질서보다 더 나을 수 없다.”고 했다. 미국과 영국을 살린 레이거니즘과 대처리즘은 이런 신념의 소산이었다. 그 반대의 길에 간섭주의가 있고 간섭주의의 결과물이 덩굴처럼 엉킨 각종 규제인 것이다. 이 정부가 벌이고 있는 규제와의 전쟁도 벌써 패색이 짙다. 대통령 임기가 2년도 안 남았고 더구나 여소야대 정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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