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R INSIGHTⅢ
당신이 꿈꾸는 일과 삶의 균형은 무엇인가 정시에 퇴근해서 가족과 함께 오순도순 정담을 나누면서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하는 삶은 언제쯤 완성될 수 있을까? 회사로부터 참으로 많은 혜택을 누리고 있고 여전히 나의 일을 사랑하며 직무에 몰입하고 있다고 자부를 하면서도, 가끔은 힘들고 속상한 순간에 직면할 때면 ‘다 내려놓고 제2의 커리어를 시작할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때가 있다. 그러면 여전히 이루지 못한 꿈과 목표가 있는(혹자들은 이를 야망과 욕심이라고도 부를 수 있으리라) 나의 내면의 자아는 아직은 때가 아니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답한다. 이것이 현실 속에 있는 나의 솔직한 모습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들 대다수의 모습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또 꿈을 꾼다. 쓰나미처럼 밀려드는 이메일이 없는 곳, 숨 돌릴 틈 없이 바쁘게 진행되는 비즈니스 미팅으로부터 자유로운 곳, 일과 시간 이후에도 핸드폰을 보면서 메시지, 이메일, 전화 등 놓친 것이 없는지를 체크할 필요가 없는 그런 파라다이스를 말이다. 일과 삶의 균형이 완벽하게 이루어지는 직장 생활. 아니 완벽할 필요까지는 없을지라도 일과 삶의 균형이 조화롭게 이루어지는 직장 생활. 언제부터인가 ‘일과 삶의 균형(Work and Life Balance)’은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직장에서 내세우는 모토가 되어버렸다. 실제로 많은 기업들이 이를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실행하고 있다. 일부는 어느 정도 정착이 되어가는 것 같고 일부는 아직도 요원한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이전보다는 확실히 나아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상황이 이렇듯 조금씩 나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급진적인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진행 속도가 더디다고 불만을 토로한다. 이런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참으로 안타깝다. 왜?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는 것은 단순하게 인사부가 몇 가지 프로그램 잘 만든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또 대표이사나 오너의 강력한 지침이 있다고 해도 다수의 임직원들이 이를 소화시킬 준비가 되어있지 않다면, 액자 속에 갇힌 구호에 그칠 공산이 크다. 우리 모두는 모 기업이 한때 대대적인 캠페인을 했던(물론 이는 일과 삶의 균형만을 위한 문제는 아니었지만) ‘7~4제’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침 7시에 출근하고 오후 4시에 퇴근하는 제도. 해당 기업의 관계자에 따르면 강제로 사무실을 소등하는 등 제도 정착을 위해 밀어 붙여보았지만 생각대로 잘되지 않았다고 한다. 비즈니스의 현실 속에서는 포기 할 수 없는, 시간 내에 완성해야만 할 중요한 현안들이 늘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들의 몸과 마음에 내재화되어 버린 문화코드가 바뀌지 않아서일 것이다. 우리에게 먼저 필요한 것들은 선진국 수준의 일과 삶의 균형을 꿈꾸고 있다면, 이는 참 거창한 프로젝트가 될 것이다. 어쩌면 우리 국민들의 사고와 생활패턴까지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며 그에 따른 유·무형의 인프라 구축이 동시에 수반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이는 곧 정부가 어떤 역할을 해주어야만 한다고 전제하는 것일 수도 있다. 논제를 크게 확대하기보다는 그에 앞서 기업과 그 안에 몸담고 있는 우리 임직원들이 생각해야 할 몇 가지 원칙들을 함께 살펴보고 실천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더 중요할 것이다. 이것만으로도 이전보다는 한결 더 나아진 일과 삶의 균형을 갖기 위한 좋은 출발점의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회사의 강력한 의지와 방향에 따라 더 나은 일과 삶의 균형의 캠페인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직원들과 함께 이 일을 시작하는 것을 권해주고 싶다. 요즘에 웬만한 기업들은 가족 친화적인 경영이니, 일과 삶의 균형이니, 신바람 나는 직장 문화운동 등을 통해 직원들의 만족감과 일에 대한 몰입 수준을 높이려는 노력을 시도하고 있다. 그러나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작하기 전에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계획을 수립해보는 것은 어떨까? 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소속감 고취와 몰입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몇 해 전에 직원대표를 소집시켜서 우리가 좀 더 나은 일터, 그리고 좀 더 업무에 몰입하고 좀 더 가정 친화적인 경영을 하기 위해서 함께 시도해야 할 과제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2개월간에 걸쳐서 같이 고민해본 적이 있었다. 매주 직원대표의 의견을 확인하고 이를 개선시킬 수 있은 과제를 도출하다 보니 당초 예상했던 것 이상의 결과를 만들 수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실적은 노사가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함께 고민함으로써 같은 공감대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서로가 공감하지 못하는 일과 삶의 균형, 서로가 노선이 다른 일과 삶의 균형은 또 다른 불만과 갈등을 더 야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 작은 것부터 실천해보자. 직원들에게 “일과 삶의 균형을 위해서 당장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으레 초반에는 굉장히 거창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일부는 너무 큰 이야기, 엄청난 혁신과 급진적인 문화 혁명 범주의 변화를 주장할 때도 있다. 예를 들면, 근속 5년 이상이면 무조건 한 달 이상 안식 휴가를 부여하자는 요청 등이다. 그러나 기억해보자. 요즘은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는 주5일 근무이지만 대한민국에서 주5일 근무가 어느 날 갑자기 한날한시에 모든 기업에서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 주어진 연간 법정 휴가도 상사 눈치 보느라고 제대로 소진하지 못하는 기업문화에서 5년 근속한 사람들에게 모두 일률적으로 한 달 이상의 안식년을 준다는 것은 순서가 바뀌어도 한참 바뀐 주장이 아닐 수 없다.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전 직원이 연간 2차례 이상 현실적인 휴가 계획과 근무 조를 편성해서 법정휴가를 70% 이상 소진하는 운동이라든지, 주 1회 꼭 정시퇴근하는 가정의 날이나 야근 없는 날 실천, 주 1회 미팅 없는 날 실천하기, 주 1회 유연근무 시간 제도 활용하기, 주 1회(주로 금요일 오후 등을 활용한) 재택근무, 관리자급 이상이 먼저 휴가 사용하는 운동 등 작은 것이지만 먼저 실험적으로 해볼 수 있는 것들을 제도로 만들어서 경영진과 인사부의 리드 및 직원들의 동참으로 실행해 보는 것이 한 단계 더 높은 일과 삶의 균형을 만들어가는 반드시 거쳐야만 할 과정이라고 믿고 있다.
셋째, 프로그램을 만들기 전에 문화를 먼저 만들어라. 일과 삶의 균형은 관련 제도나 프로그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따지고 보면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고 정착시켜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제일 중요한 것은 리더들의 솔선수범이고 열린 마음이다. 그러나 직원들의 입장에서도 책임을 져야 할 부분이 있다. 직장 생활 초년시절에 필자는 비교적 문화가 보수적이라는 H그룹에서 근무를 했다. 그럼에도 겁 없이 그 당시 틈만 나면 1년에 한두 번은 세계 곳곳을 혼자 여행을 하곤 했다. 급기야 나의 이런 삶을 지지해준 많은 동료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과 요청으로 사내에 배낭여행 동아리를 결성하기에 이르렀고, 우리는 1년에 한 번은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자는 결의를 했다. 그러나 막상 때가 되니 여기저기에서 자기는 여행을 갈 수없다는 볼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당시 우리에게는 1년에 한 번 정도는 해외를 다녀올 수 있을 정도의 충분한 휴가가 법적으로 부여 되었음에도 말이다. 확인해 보니 다수의 직원들이 눈치를 보느라 아예 휴가 자체를 신청하지 못했다. 그럼 나는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을까? 마음씨 좋은 매니저를 만났기 때문인가? 아니다. 업무 펑크가 생기지 않도록 사전에 모든 것을 조율했고 이와 더불어 휴가의 필요성과 이를 잘 승인을 해달라고 매니저와 지속적인 대화를 했었기에 가능했다. 물론 초반에는 미운털도 박혔고 마음고생도 있었다. 하지만 높은 업무성과로 여행을 통한 충전된 효과를 보여주었다. 문화를 만들고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데에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프로그램 제정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문화는 같이 만들어 가는 것임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유럽인들에게 내가 배운 것 필자는 여러 다국적 기업에서 근무한 덕에 유럽의 임직원들과 함께 일할 기회가 많았다. 회사의 배려로 가족들과 함께 독일 함부르크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일견 꿈같은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거주했던 마을은 고요한 수목원에 들어와 있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녹음이 짙은 마을이었다. 정원이 딸린 단독주택에서 살았었는데 대문을 열고 나가보면 마을의 길들은 천혜의 산책길이요, 조깅 코스 그 자체였다. 저녁 7~8시 정도가 되면 상가는 다 문을 닫기에 딴전 피우지 않고 미련 없이 가정으로 돌아갈 수 있었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주말이면 정원에서 가족들과 운동도 하고 장난도 치고, 이따금 동네로 산책을 나갈 때면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는 생활도 많이 했다. 저녁이면 집사람과 와인이나 맥주를 즐기며 담소를 나누는 것은 생활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가끔씩은 차를 몰고 인근 유럽국가로 쇼핑 겸 드라이브를 다녀오기도 했다. 내 인생에서 가장 완벽하게 일과 삶의 균형을 이루었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가족 중심의 문화, 일과 삶의 균형이 지구상에서 가장 잘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유럽에서도 모두가 다 365일을 그렇게 생활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삶을 누렸지만, 나 역시 많은 출장과 프로젝트로 긴장된 시간을 보내야 했고, 내가 상대했던 나의 보스를 비롯한 회사의 고위 임원들은 일과 시간 중에는 더 살인적인 스케줄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스스로가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몰입해서 일을 처리해갈 수 있는 능력이, 생산성이 나보다는 한 수 위였던 것 같고, 또 사회 전반에 정착한 문화 때문인지 일을 많이 하면서도 적어도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비단 임원뿐만이 아니라 일반 직원들 역시도 근 한 달 이상의 휴가를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사회 저변에 깔려있는 문화와 인프라의 역할도 중요했겠지만 그들은 스스로가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떻게 일을 하고 어떻게 삶을 풍성하게 즐길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참 분명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우리에게도 이런 자세는 필요할 것 같다. 내가 스스로 찾고 갖고자 하는 일과 삶의 균형은 어떤 모습인지, 우리 회사가 지향하는 일과 삶의 균형의 바람직한 모습은 무엇인지를 먼저 그릴 수 있어야겠다. 매일 매일 칼퇴근하는 모습, 충분한 휴식을 즐기고 모든 법정 휴가를 다 쓰고도 남음이 있고, 업무에 대한 부담감도 없고, 부족함 없는 보상이나 승진까지 이 모두를 기대한다면 너무 무리한 그림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 소유할 수는 없다. 아마 유럽인들이 누리는 균형 있는 삶의 모습도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으리라. 모처럼 주말 저녁에 아내와 함께 산책을 즐겼다. 잘 정비된 산책길, 잘 만들어진 뒷동산의 둘레길, 여유 있게 산책하고 운동하는 사람들의 모습. ‘우리 주변에서 이런 모습들을 쉽게 볼 수 있었던 것이 불과 언제부터였던가?’하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주5일 근무가 현실적으로 가능할까를 고민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너무나 당연하게 주5일 근무의 생활을 즐기고 있듯이 앞서 언급한 세 가지 기본적인 원칙과 마인드 세트를 우리가 충실히 생활 속에서 실천할 수만 있다면 일과 가정 사이의 균형은 이루어질 것이고 우리 삶의 질도 분명 지금보다는 훨씬 더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