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민의 세상보기

사회적으로 제발 좀 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야근을 끝낸 당신. 늦은 밤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강북 강변도로를 빠르게 달리고 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서 눈도 침침한데 어떤 이상한 녀석 하나가 도로변에 서서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다. 보아하니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은 멀쩡한 청년이네. 당신이라면, 이 낯선 청년의 수신호에 차를 멈추겠는가? 아니겠지. 당연히 ‘별 이상한 녀석 다 보겠네’하며 지나치고 말겠지. 그런데 이 청년이 경찰관 복장을 하고 경광등을 흔들고 있다면? 더구나 그 뒤에 경찰차까지 서 있다면? 그렇다면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똑같은 청년인데 멈추고 멈추지 않고를 결정하는 차이는 무엇일까? 경찰관 복장 아니면 경광등? 그것도 아니면 경찰차?

이러한 행동의 차이를 불러오는 것을 우리는 ‘권위(Authority)’라고 한다. 권위는 ‘시키면 아무 말 없이 따라 하게 하는 힘’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경찰관이 차를 세우라면 멈추는 것, 목사님이 기도하자면 하는 것, 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면 대답하는 것, 세금고지서가 나오면 생각 없이 세금을 내는 것, 팀장이 시키면 군말 없이 그대로 하는 것 등으로 설명 할 수 있다. 마지막은 좀 아닌가?! 요즘 애들은 매사에 구시렁거리거나 투덜거리니 말이다. 그러면 특정인들에게 군소리 없이 시키는 대로 하게 만드는 ‘권위’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아마도 모두가 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는지 여부에서 나올 것이다. 당연히 우리가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지시는 따르지 않는다. 가령 경쟁사의 사장이 여러분에게 뭔가를시킨다면 별 이상한 인간이 다 있다는 식으로 웃고 말 것이다. 그런데 우리 회사 사장님에게 그런 웃음을 똑같이 지었다가는 아마 한동안 힘들어질 것이다.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궁금하다면 한번 해보시라. 아마 영겁처럼 길다는 게 뭔지 알게 될 거다. 당연히 ‘인정’의 크기가 클수록 그 힘은 더 세질 수밖에 없다. 실무자의 입장에서는 팀장보다는 임원, 그보다는 사장의 지시를 더 빨리 수행할 수밖에 없다. 다들 사장님 지시는 모든 걸 제쳐두고 번개같이 할 것이다. 사장의 ‘권위’를 더 크게 인정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이러한 ‘권위’란 것을 왜 만들었을까? 서울대학교 이근 교수는『도발하라』라는 최근작에서 이를 ‘거래비용(Transaction Cost)’의 최소화를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시키는 대로 안 할 때마다 때리고, 괴롭혀서 본보기를 보여야 한다면 어떨까? 정말 피곤하고 힘들지 않을까? 혹은, 지시한 대로 해야 하는 이유를 항상 일일이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한다면 그건 어떨까? 당연히 어떤 일을 할 때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 수밖에 없고, 일을 이뤄내는 속도가 길어지겠지. 그래서 복잡한 과정과 불필요한 옥신각신을 줄이기 위해 인간이 권위란 걸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이 바로 ‘거래비용의 최소화’라는 의미이다. ‘권위’는 어제오늘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먼 옛날 우리 선조가 가죽 팬티를 입고 돌도끼를 들고 다니면서 동굴 집에서 살 때부터 ‘권위’는 있었다. 처음에는 주로 종교적인 제의를 통해서 신과 소통한다고 사기치는 인간들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시작되었다. 한민족의 태동이라고 말하는 단군신화는 ‘단군왕검’이라는 권위 체계에서 시작되었다. 여기에서 ‘단군’이란 종교적 제의를 독점하는 ‘제사장’의 의미이고, 왕검이란 것이 군사적 폭력을 독점하는 ‘군장(軍將)’의 의미란 걸 아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이것들이 죄다 ‘권위’이다. 아무튼 그런 권위란 것이 있으면 일의 속도가 빨라지고 일사불란해서 굉장한 효율이 생겨난다. 어쩌면 그게 한국 경제가 벼락치듯 성장한 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권위가 주는 속도와 힘을 깨달은 사람이 높은 사람이 되면? 아마도 경쟁자보다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빠르고 많은 효과를 올리려고 할 것이다. 당연히 반대하는 사람, 발목 잡거나 질문하는 사람들은 확 쓸어버리고 ‘국론의 통일’을 기대하겠지. 그런데 그게 일정한 수준을 넘어버리면 그 ‘권위’는 ‘권위주의’라는 부정적인 형태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리드하는 조직은 ‘군대문화’라는 독특한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조직은 엄청나지겠지만 과연 좋기만 할까? 경희대학교의 이만열(미국명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가 한국 사회에서 살면서 느낀 점을 쓴 최근 책 제목이『인생은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다』이다. 그가 보기에 한국 사회는 속도는 엄청나지만 자주 방향이 틀린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요즘 같은 세상에 틀린 방향으로 빠른 속도로 달리면 정확히 그 속도만큼 빨리 망할 수밖에 없겠지. 이만열 교수는 그걸 꼬집은 것이다. 결국 팀장이네 임원이네 하는 인간들이 ‘지시’를 통해서 일을 하는 것은 그 직책에 대해 모두가 ‘권위’를 인정해주기 때문이다. 목에 힘을 줘봤자 권위가 없다면 어차피 모두가 1인분의 인생일 뿐이다. 그들이 가진 힘이란 것이 그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남들이 ‘인정’해주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요즘 애들은 왜 고분고분하지 않을까? 그건 기성세대가 그랬던 양만큼 상사의 ‘권위’를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권위를 인정하는 양에 있어 세대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걸 모르는 상사들은 자신이 기대하는 수준으로 부하들에게 요구하고 부하들은 그것을 도를 넘은 상사의 ‘갑질’이라고 평가해버리는 것이다. 자신의 기대만큼 말이 안 통한다고 생각하는 상사는 권위의식에 상처를 입고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까불면 이렇게 된다’는 시범케이스를 보여준다. 그러면 그게 ‘파워하라(Power Hara)’가 되고 ‘상사 갑질’이 되는 것이다. 어느 영화 제목처럼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어차피 세상은 바뀌어서 옳고 그름의 기준이 달라졌다. 그런데도 권위의 힘이 주는 속도와 거래비용 절감 효과에 취해 있어서는 곤란할 것 같다. 환경에 적응을 해야 생존할 수 있다는 것은 수백만 년의 진화의 역사에서 반복하여 확인된 사항이다. 어쩌겠는가! 리더들은 지시한 업무의 이유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납득시켜야 한다. 그게 변화하는 시대에 리더가 살아남는 방법이다. 티라노사우루스만한 권위가 주는 찌들어 빠진 힘에 취한 리더들은 빨리 꿈에서 깨야 한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기 때문이다. 설득의 리더십 능력이 없으면 당장에라도 연마를 하든가. 그것마저 싫으면 ‘리더’를 하지 말든가. 이래저래 리더 역할 하기가 힘들어지는 것 같다. 그래도 뒤집어서 생각하면 리더 역할이 힘들고 어렵기 때문에 월급 더 받는 것이 아닐까? 승진을 바라는 우리는 조금더 힘들어져도 어쩔 수 없는 건가 보다.

유료회원전용기사

로그인 또는 회원가입을 해주세요. (유료회원만 열람가능)

로그인 회원가입
저작권자 © 월간 인재경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