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호 한국티소믈리에연구원 원장

차(茶, Tea), 정확히는 ‘카멜리아 시넨시스(Camellia sinensis)’라는 차나무 잎을 여러 방식으로 가공한 음료를 말하지만, 허브, 과일 등 다양한 식재료를 통해 즐기는 대용(代用)차까지 포함해 이제는 그 범주를 헤아 리기 힘들 정도로 넓고 다양한 차를 경험하고 있다. 일상을 장악한 커피처럼 빠르고 자극적이지는 않지만, 은은하고 서서히 맛과 멋, 효능으로 우리의 삶을 파고드는 차. 이러한 문화를 앞서 예측하고 준비해 온사람이 있다. 국내 1호 티소믈리에이자, 사람들에게 차에 관한 다양한 정보와 가치를 전하는 전문가 양성에 힘쓰고 있는 정승호 한국티소믈 리에연구원 원장을 만나 이야기 나누었다.

경영 컨설턴트, 차(Tea)를 만나다

정승호 원장은 미국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캐나다 어카운팅 펌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해외근무 경력을 바탕으로 한국에서 금융 투자회사의 회계부문 컨설팅을 오랫동안 진행했다. 국민은행, 포스 코, 키움증권 등 대기업의 ERP, CRM 도입 및 설계 PM으로서, 1990 년대 중후반 당시 굉장히 핫한 포지션을 지냈다. 그 길로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배경을 뒤로 하고 그가 택한 것은 ‘차(Tea)’였다.

“단적으로 지금보다 옛날이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였다고 말한다면 설명이 될까 모르겠다(웃음). 일에 집중하기 위해 습관적으로 마시는 커피, 프로젝트에 따른 야근, 나를 몰아붙였던 일상이 누적된 결과였다. 컨설턴트로서의 삶이 특별히 나빴다기보다는, 내가 만들어온 습관을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해외출장을 통해 틈틈이 접했던 차를 통해 육체적,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변화를 경험했고 나라별차 시장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레 한국에서의 가능성을 점쳐봤던 것 같다.”

팩트를 기반으로 분석하고 수치화하는 그의 직업병이 차라는 아이 템을 만나면서 폭발했다. 업무를 병행하면서 한국, 일본, 미국, 유럽등 차 브랜드와 시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공부했다.

“컨설턴트로 일할 당시 유럽출장 중 세계적인 티 브랜드인 로네펠트(Ronnefeldt)를 접했다. 2000년대 초반 한국은 스타벅스와 여타 커피 브랜드들이 오프라인 매장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시기였고 차에 대한 인식이나 상품은 전무했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녹차 아니면 유자차, 대추차와 같이 흔히 대용차로 분류되는 것들이 소비될 뿐이었다. 우선 시장에 상품이 깔려야 사람들이 인식하고 소비할 것 아닌가.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고 로네 펠트 본사에 제안서를 보냈다. 이내 회장이 일본을 방문할 계획이 있으니 거기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연차를 내고 만난 첫 미팅에서 로네펠트 한국 판권을 얻었다.”

넓고 깊은 차의 역사와 종류, 맛과 효능에 부딪혀 더 이상 기존의 일과 병행할 수 없다고 판단해 본격적으로 손발을 걷어붙였다. 퇴사 후 그는 본격적으로 한국에 로네펠트를 알리고 시장에 안착시키는 작업을 이어갔다. 동시에 세계 각지를 돌며 티 전문가로서의 자격 갖추기에 몰두했다.

국내 1호 티소믈리에, 경험이 자산이라 말하는 실천가

그의 마지막 직장인 오라클 재직 당시, 한국 차 시장의 가능성을 타진하기 위해 휴가 등 틈만 나면 무작정 배낭을 메고 일본을 훑기 시작했다. 일본은 우리와 동일한 아시아 문화권이자, 한국에 10~20년앞서는 산업 패턴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다양한 종류의 차는 물론 생각보다 큰 소비시장이 존재하는 것에 놀랐다. 일본이 차 생산국인 탓도 있겠지만 수많은 외국 브랜드들이 자리잡고 있는 것에 비춰보면 머지않아 우리나라에도 바람이 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의 유명 호텔 매니저들이 일본 호텔리 어들을 상대로 하는 티 교육에 참여하면서 전문적인 공부를 이어 갔다. 이후 로네펠트 판권을 받고서부터 국내 특급호텔을 대상으로 납품 및 교육을 진행했다.”

호텔리어 교육 중심의 일본과 차밭 중심의 스리랑카, 인도, 소비시장 벤치마킹을 위한 유럽, 싱가포르, 두바이 등 안 거친 나라가 없을 정도로 강행군이었다. 커피를 끌어안고 모니터 앞에서 고군분투했던 시절과 비교해 보면 육체적으로 더 힘든 여정이었지만 그 속에는 차가 주는 여유와 위안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배움을 즐겼다. 경험하지 못하면 가난하다고 말하는, 지독한 실천가다.

탁월한 마케팅 능력, 팩트로 말하는 사람

로네펠트 한국 판권을 단번에 가져 온 것부터 국내 유수 호텔체인 납품과 호텔리어 교육에 이르기까지, 단기간에 한국의 차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 마케팅에 탁월하다는 인상이 깊어 본인만의 전략이 있는지 물었다.

“탁월하다기보다 절실했다는 표현이 어울리겠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시작했으니 판권을 따는 것도, 브랜드를 알리는 일도 허투루 할 수 없었다. 일전 로네펠트 회장님이 나의 일하는 방식을 두고 본사 직원에게 ‘너도 저렇게 해보라’며 혼낸 적이 있다. 유럽은 성숙한 시장이고, 우리는 빨리 판을 키워서 수치를 눈앞에 보여줘야 했기에 바빴던 것인데, 그 직원은 얼마나 억울했을까(웃음).”

차 소비시장의 전문가, 티소믈리에 양성

깊은 역사, 기술을 요구하는 전문분야의 경우 해외는 도제 시스템 으로 인재를 양성한다. 차 역시 마스터가 되기 위해서는 짧게는 수 년, 길게는 수십 년의 실무를 거쳐야 한다. 정 원장은 국내 1호 ‘티 마스터(Tea Master)’라는 타이틀로 알려졌지만 스스로 용어를 재정 립하고 자신과 같은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들을 키워내는 데 눈을 돌렸다. 2008년 로네펠트 캐나다 대표를 받으면서 현지 아카데미 법인을 세웠고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본격적인 티소믈리에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처음 사람들이 나를 ‘티 마스터’라고 불렀지만, 정확히 따지면 마스 터는 산지에서 수십 년간 차를 연구하고 맛본, 해당 지역에서 생산 되는 차종에 특화된 장인들이다. 나는 소비지의 티 전문가에 가깝고 그에 해당하는 용어가 바로 ‘티소믈리에’다. 국내 식음료산업의차 전문가를 키워내자는 목표로 8년 전 한국티소믈리에연구원을 세웠다.”

한국티소믈리에연구원은 국내 최초로 민간자격증을 등록하고 최다 티소믈리에를 배출하고 있다. 서울 본원을 중심으로 전국 7개 분원을 운영하며 티소믈리에과정, 티블렌딩과정 크게 두 분야로 나누어 교육한다. 티소믈리에의 자질이 있다면 무엇일까.

“차에 대한 애정이 있다면 현실적으로 힘든 부분도 극복 가능하다. 그 외에는 맛보고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 누구라도 전문가로 성장할수 있다. 그저 한 발 먼저 시작한 나로서는 그간 쌓아 온 모든 노하 우를 교육생들에게 전달할 뿐, 똑같이 새로운 배움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

정 원장은 그간 20여 권이 넘는 차 전문서적을 출간했다. 차의 역사 에서부터 전문가가 되기 위한 교육서적까지 나라별 최고 수준의 서적을 번역하고 교재를 만들었다.

“돈을 벌고자 했다면 아마 출판 쪽은 쳐다보지도 않았을 것이다(웃 음). 시장을 넓히고 전문가를 양성하려다 보니 체계적인 서적들이 필요했다. 국내에는 전무한 차 관련 서적을 출판하기 위해 국가별로 최고의 도서들을 선별해 판권을 사고 번역했다. 수입이 발생하는 즉시 책 출간에 투자했다. 양서, 전문서적이 많아져야 산업이 발전한다. 인프라 구축을 위해 도서 출간을 지속할 예정이다.”

어렵지만 잠재력 높은 시장, 젊은이들이 도전하도록 법과 제도로 길을 터줘야

“대한민국 차 산업 발전이 젊은이들에게 기회를 주리라 믿는다. 차를 알려고 마음의 문을 열면 창업의 기회가 많다. 커피가 밟아온 길보다 느릴지언정, 그 범주는 훨씬 넓고 깊다. 내가 차를 20년 가까이 알아왔지만 여전히 학생의 자세로 임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더불어 차 시장을 한국에만 국한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세계적인 티브랜드들은 로컬만 가지고 간 곳은 단 한군데도 없다. 사업의 확장 성을 꼭 생각하라. 차는 세계적인 교류를 만들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차가 만들어 온 무역의 역사를 떠올려 보면, 한국 시장은 너무 좁다.”

차 시장의 성장 가능성에 반해, 법은 너무나 폐쇄적이다. 젊은 창업이 활발히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의 노력을 그는 호소했다.

“우리나라 GNP 대부분이 해외와의 교류에 의해 생겨나는데 차는 오가는 것이 거의 없다. 70년대 새마을 운동 때 생긴 법(차산업 보 호법)이 여전하다. 모든 재화의 무역이 다 열리는데 차는 여전히 굳게 닫혀있다. 경쟁력이 생기려면 개방해야 한다. 프랑스, 싱가포르등 차가 생산되지 않는 국가들은 가공무역을 통해 고부가가치산업을 일구었다. 브랜드, 마케팅 등 아이디어만 더했을 뿐이다. 우리나 라는 차를 검역하고 들여오는 일부터 까다롭다. 시작단계에서 각종 검사비로 자본금을 잠식하면 어떻게 사업을 할 수 있나. 규제만 개혁되어도 청년창업이 활성화될 수 있다.”

차를 통해 삶의 풍요로움 누리길

“차는 삶을 풍요롭게 해줄 요소가 많다. 각종 차종의 효능을 통한 체질 및 건강 개선과 다도와 같은 문화, 기호식품으로서 다채로운 매력을 지녔다. 굳이 티소믈리에 같은 업이 아니더라도 차를 통해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었으면 한다.”

정 원장은 티소믈리에 양성과 교육서적 출간을 비롯해 좋은 원료를 소싱하는 일을 꾸준히 지속할 계획이다. 그의 노력과 더불어 차의 향과 멋이 깃드는 대한민국이 되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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