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 제주 위미리

같은 겨울이었지만 제주의 공기는 따뜻했다. 두꺼운 패딩 점퍼를 입은 것이 왠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괜스레 주위 사람들의 옷차 림을 살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의 풍경 때문에 덜컥 멈춰서 버렸다. 잠시 제주를 방문하지 못한 사이에 제주에 큰 변화가 생겼다. 제주 도심 뒤로 우뚝 서 있는 한라산이 어느새 흰 모자를 쓰고 있었다.

오늘의 목적지는 서귀포시 위미리. 시선은 계속하여 따뜻한 남쪽을 향했다. 차량은 중산간을 넘어 한라산의 남쪽 사면을 타고 내려갔 다. 이윽고 저 멀리 남쪽 바다가 보였다. 파도는 잔잔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내 마음은 점점 일렁이기 시작했다.

위미리에 도착해 가장 먼저 애기동백군락지로 향했다. 애기동백은 흔히 토종 동백이라 일컬어지는 붉은 동백에 비해 큰 분홍빛의 꽃잎을 가졌다. 이른 겨울부터 화려하게 피기 시작하는데, 멀리서 바라보아도 봉긋하게 솟아오른 여러 그루의 애기동백나무가 벌써부터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혹독한 계절에 피어난 아름다움을 종이에 담고 싶어졌다. 드로잉북에 천천히 꽃과 나무의 모습을 담았다. 그림을 그리며 한 곳에 오래 머물자,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더욱 또렷이 들려왔다. 가족, 친구 혹은 연인과 함께 찾아온 이들의 즐거운 재잘거림이 귓가에 맴돌았다. 아름답게 피어난 것들은 그 존재만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애기동백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더 오랜 세월 이 마을을 지켜온 붉은 꽃이 보고 싶어졌다. 위미 동백나무 군락을 보러 발걸음을 옮겼다. 애기동백 군락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걸어가니 마을 한가운데에 푸르게 솟아있는 작은 숲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숲은 현맹춘(1858∼1933) 할머니의 정성으로 만들어졌다. 할머니는 부지런하고 검소한 생활로 어렵게 사들인 땅에 한라산의 동백 씨앗을 따다 뿌려 가꾸었는데, 오랜 세월을 거친 후 거친 황무지는 지금의 울창한 동백 나무 숲이 되었다.

아직 이른 겨울인 12월인 까닭에 활짝 피어난 붉은 동백은 아직 만개하지 않았다. 토종 동백은 가장 추운 겨울에 피기 시작해 봄까지 꾸준하게 피어나기 때문 이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웅크리고 있는 봉오리들을 바라보며, 한두 달 후 탐스럽게 물들어갈 숲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겨울에 아름답게 피어나는 마을 위미리. 이 작고 사랑스러운 마을을 한 번 더 찾아올 이유가 생겼다.

 

리모(김현길) 여행드로잉 작가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연구원으로 재직하다 여행과 일상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여행드로잉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JTBC 드라마 <스케치>에서 그림작가로 참여했으며, 독일 문구업체인 스테들러 후원작가이다. 저서로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드로잉 제주」가 있다.
인스타그램 @rimo_kim 공식홈페이지 rimo.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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