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태의 저작권 클리닉

Q. 외국도서의 한국어판 출판권을 얻어 번역서를 내려고 한다. 모든 계약이 완료된 상태이며 번역서 인쇄를 앞두고 있는데, 번역서의 제목이 문제다. 번역서에 원서의 제목과 다른 제목을 달고자 하는데 괜찮을까? 물론 새 제목은 책의 취지를 잘 반영한 것으로 국내 출판시장에서의 마케팅을 감안한 것이다. 계약서에는 제목 변경에 관한 조항이 없다. 이런 경우 국내 출판사가 임의로 제목을 변경할 수 있는 것인지 알고 싶다.

제호(題號)란 저작물의 제목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제호는 저작물의 내용을 집약하여 짧은 문구로 표현한 것이므로, 이를 무단으로 변경한다면 저작자에게는 사실상의 인격권 침해가 될 수 있다. 나아가 주제나 내용과는 상관없이 저작물의 상업적 이용만을 위해 제호를 무단으로 바꾸게 될 경우에는 더욱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현행 저작권법에서는 ‘동일성유지권’에 대해 “저작자는 그의 저작물의 내용ㆍ형식 및 제호의 동일성을 유지할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제호는 저작인격권으로서의 동일성유지권 보호대상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원래 제호 자체는 저작권법에서 보호하는 저작물이 아니므로 저작물을 작성하는 사람이 다른 저작자의 제호를 무단으로 사용하더라도 저작권 침해가 성립되지 않는다. 제호를 독립적인 저작물로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저작권법 제정의 취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저작권을 보호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문화의 향상발전인데, 만약에 모든 제호를 저작물로 인정할 경우―예컨대, 어떤 사람이 ‘사랑’이란 제목으로 글을 썼다면 이후에는 그 누구도 ‘사랑’이란 제목으로는 저작행위를 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엄청난 혼란이 일어남으로써 문화의 향상발전보다는 일부에 의한 독점현상으로 폐해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경우 저작물의 제호에 한해서는 저작물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제호 자체가 저작권법에서 보호하는 저작물이 될 수 없다고 하여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즉, 저작물이 복제된 출판물을 예로 든다면 출판물도 하나의 상품이기 때문에 매우 독창적인 제호라면 산업재산권에서의 상표로서, 또는 부정경쟁방지법에 의한 상표로서 보호받을 수 있다.

위의 질문을 다시 살펴보면, 결국 내용뿐만 아니라 제목도 엄연히 저작인격권상의 동일성유지권 보호대상이라는 점에서 기왕의 계약 내용에도 적시되어 있는 것처럼, 원 제목을 다른 것으로 바꿔 이용하려면 당연히 원저작자의 동의를 얻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 현실에 맞게 고쳐야 한다는 취지에만 집착하여 임의로 새 제목을 정해서 이용하는 경우 원저작자가 저작인격권 침해 및 번역출판계약 위반을 주장하는 경우 속수무책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가피하다면 제목을 바꿀 수밖에 없는 이유를 잘 설명해서 원저작자의 동의를 얻어야 할 것이다.

한편, 최근에는 현대사회에서 저작물의 제호가 갖는 대중적 광고력과 고객흡인력도 대단하다고 할 것이므로 일률적으로 모든 저작물의 제호에 대해 저작물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부당하며, 제호 중에도 사상이나 감정을 창작적으로 충분히 표현한 것이라면 저작물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견해도 등장하고 있다. 예컨대, 단문으로 구성된 시(詩)도 어문저작물로 인정되므로 현대사회에서 제호가 갖는 사회적·경제적 중요성을 고려해서 제호 자체만을 놓고 보더라도 사상이나 감정을 창작적으로 충분히 잘 표현한 것이라면 저작물성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견해도 일면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반면, 타인이 창작하여 널리 알려진 저작물의 제호를 무단 사용하여 소비자에게 혼동을 일으켜 무임승차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악의의 행위자에 대해서는 부정경쟁방지법에 따라 엄중하게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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