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 제주 모슬포
겨울의 제주가 그리워 다시 남쪽으로 날아갔다. 섬에 불어오는 바람은 봄이 요원하게 느껴질 만큼 차가웠지만, 미세먼지 없이 맑은 하늘이 무척이나 반가웠다. 제주 공항을 출발한 차량은 머리를 서남쪽으로 돌려 모슬포로 향했다.
모슬포는 서귀포시 대정읍내에 인접한 포구의 이름이다. 예전에는 어선들이 정박해 있는 모슬포 항구와 그 인근의 번화한 대정읍내를 함께 포함하는 지명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나, 행정구역이 정리되면서 대정읍내가 상모리, 하모리로 나뉘어 모슬포라는 지명을 개정된 지도에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제주도 서남권의 가장 큰 어업항으로 마라도와 가파도를 오가는 여객선 터미널도 이곳 모슬포에 있다.
오래전 모슬포는 '모슬개·모실개'로 불렸다. 모슬개의 '모슬'은 모래를 뜻하는 제주방언 '모살'에서 유래한 것이며, '개'는 포구를 뜻한다. 즉, 모슬포는 '모래가 있는 포구'라는 의미를 갖는다. 모슬포의 유래를 '못살포'라고 부르게 된 것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환경이 척박하 여 사람이 못 사는 땅이라는 것을 빗대어 표현한 것인데, 영상의 기온임에도 불구하고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차가운 모슬포의 바람을 맞아보니 그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았다.
'못살포'라는 웃기고 슬픈 별명은 한국 전쟁을 거치며 단단히 자리 잡았다. 1951년 1월에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육군은 대구에 있던 육군 제1훈련소를 모슬포로 옮겼다. 대규모 병력과 피난민이 함께 몰려들었고, 인구 2만 가량이던 조그만 읍내는 갑자기 불어난 10만 명의 인구를 감당해야만 했다. 특히 물 부족이 심각 해서, 훈련병들은 1주일 동안 발 한 번 씻지 못해 꼬질꼬질했다고 한다. 이제는 그 흔적이 많이 사라져 버렸지만, 당시 육군 제1훈련소의 정문과 공병대에 의해 건립된 강병대교회가 남아 있어 당시의 굴곡진 현대사를 잠시 가늠해 볼 수 있었다.
모슬포가 품고 있는 고단한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포구 안의 물빛은 아름답기만 했다. 거리에 유난히 사람이 많다 싶었더니, 포구에 들어선 횟집마다 만석이었다. 추운 계절이 되면 모슬포는 더욱 활기를 띄는데, 제철인 고등어나 방어를 맛보기 위해 많은 이들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오동통하게 살을 찌운 방어의 유혹이 여행자의 발길을 붙잡았다. 지방질이 풍부한 제철 생선들은 현지인들이 겨울을 나는 데 중요한 영양소 공급원 역할을 했으리라.
홀로 시간을 보내기 좋은 음식점과 카페, 마을 속에 스며든 작은 책방, 오래된 여관을 고쳐 만든 게스트하우스 등 머물고 싶은 공간들이 가득한 모슬포. 이제 '못살포'라는 짓궂은 별명은 과거의 저 편으로 흘려보내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