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ditor Note

오늘날 공기업 공개채용과 같은 제도가 바로 조선시대 과거제다.

고려 광종 때 도입된 과거는 조선 초기까지 취지에 걸맞은 인재 등용 창구로 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조선 중기를 거치며 공정성에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광해군 2년(1610년) 일어난 별시(別試)에서의 부정은 현재도 회자된다.

선대 선조 임금의 위패를 종묘에 봉안한 행사를 기념해 열린 별시에는 이항복, 이덕형, 허균, 박승종, 이이첨 등 당대 내로라하는 문인들이 시험관으로 나섰다. 그런데 합격자 발표 후 논란이 일었다. 사람들은 결과를 두고 ‘자서제질사돈방(子壻弟姪査頓榜, 아들, 사위, 동생, 조카, 사돈의 합격자 명단)이라며 시험관들의 염치없음을 비난했다. 문자 그대로였다. 박승종은 아들 자홍을 뽑았다. 자홍은 또 다른 시험관 이이첨의 사위였다. 이이첨은 사돈 이창후와 이웃에 사는 친구 정준을 합격명단에 올렸다. 시험관 조탁은 동생 길을 뽑았고 허균은 조카 보와 형의 사위인 박홍도를 합격시켰다. 사정(私情)의 지나침이 과해 논란이 커지자 광해군은 시험 부정의 책임을 물어 허균을 전라도 함열로 유배 보냈다. 하지만 시험 비리의 몸통은둔 채 꼬리만 자른 생색용 처벌이라는 비판은 두고두고 계속됐다.

‘자서제질사돈방(子壻弟姪査頓榜)’은 과거 일이 아니다. 2월 발표된 정부의 공공기관 채용비리 전수조사 결과 182건의 채용비리가 적발됐다. 자녀와 친인척 특혜채용은 광해군 때만의 일이 아님을 확인했다. 괜찮은 직장이라는 곳마다 채용비리와 고용세습으로 인한 잡음이 끊이지 않는다. 자연 ‘차별 없는 채용’이 화두에 올랐고, 2017년 정부는 ‘블라인드 채용’ 전면 시행이라는 강수를 뒀다. 물론 공공부문에 국한된 의무화였지만, 일반 기업들 또한 정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블라인드 채용은 대세가 되고 있다.

취준생들은 환호했다. SKY 출신이 아니라도, 스펙이 특출나지 않아도 실력만으로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그간 ‘맨 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었다면 블라인드 채용은 자신만의 방식 으로 다이빙할 수 있는 ‘푸른바다’를 열어줬다”는 공기업 신입사원의 소감은 이런 기대를 한껏 드러낸다.

한편으로 머리 좋고 일 잘하는 인재를 선발해야 하는 기업에게, 취준생들이 얻은 기회만큼의, 과제가 더해졌다. 이제껏 스펙은 채용에 있어 인재 선별의 가장 중요한 정보이자 자산이었는데 이제 눈가리고 보지 말라 한다. 그렇다면? 보지 말라는 것은 과감히 제쳐두고 꼭 봐야할 것만 ‘제대로’ 보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눈 뜨고’ 인재 찾을 유일한 기회인 면접 프로세스를 강화하거나 채용방법의 다양 성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일 것이다. 문제는? 실은 이 모두가 블라인드 채용 공론화 이전부터 제시된 방법이었다. 그럼에도 블라인드의 한계와 문제점 지적은 여전하고 대책도 그대로다.

상반기 채용 시즌을 시작하며 인재경영은 블라인드 채용의 오늘을 점검하는 특집을 싣는다. 핵심은 단순명료하다. 공정한 채용을 위해 ‘기회는 넓게 열어두되 검증은 강화해야’ 한다는 것. 블라인드 채용의 확대 시행은 인사·채용 담당자에게 새로운 도전적 과제이겠지만 어쩌면 ‘일 잘하는 자질’을 갖춘 인재를 제대로 뽑는, 채용기법이 한 단계 성장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현장의 채용담당자에게 전해들은 말이 있어 더한다. 취업준비생들이 새길 만하다. 기회의 폭이 넓어졌다고 무턱대고 환호할 일? 아니다. 채용 과정은 더욱 지난해질 것이다. 눈을 가린 만큼 이제 눈을 대신할 채용 평가의 난도가 높아질 테니까.
이래저래 취업하기 힘든 오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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