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누구나 여행을 떠나는 시대가 되었다. 약간의 재화와 시간의 소모로 우리는 손쉽게 낯선 세계 속에 나를 던져 놓을 수 있게 되었다. 여행자들은 눈앞의 낯선 풍경을 이해하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한다. 높은 전망대에 올라 도시의 스케일을 가늠해 보는 사람도 있고, 어떤 이는 현지의 음식을 먹어보거나 언어를 배우며 그곳의 문화를 읽어보며, 또 다른 누군가는 그 공간 속에 숨어 있는 가장 오래된 인간의 흔적을 찾아보기도 한다.

언제나 친숙하고 편안한 제주였다. 오히려 그렇기에 이제껏 다녀온 다른 여행지에 비해 이 아름다운 섬을 깊게 이해하기 위한 마음이 조금 소홀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문득 반성의 마음이 들었다. 그림 도구를 챙겨 다시 섬의 너른 품속에 뛰어들었다. 늘 가까이 있었음에도 들여다보지 못했던 제주의 가장 오래된 이야기를 찾아보기로 했다.

제주는 50여 년전만 하더라도 독립된 도(道)가 아니었다. 전라남도에 부속된 도서였다가 1946년 8월 1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분리 승격되 었고, 특별자치도로의 개편은 2006년 7월 1일에 이루어졌다. '제주'라는 이름은 한참을 더 거슬러 올라가 고려시대인 1211년에 처음 붙여졌는데, 그보다 더 이전에 이 섬은 '탐라'라는 도서국가를 형성하고 있었다. 제주라는 섬 위에 피어난 고대국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방문해야 하는 곳이 있다. 탐라의 탄생설화를 품고 있는 그 곳, <삼성혈>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주 시내를 지나 이도1동으로 접어드니 한겨울임에도 푸르른 작은 숲이 나타났다. 도로와 인접한 경계에는 홍살문 하나가 세워져 있었는데, 이것은 악귀를 물리치고 액운을 막음으로써 신성시되는 장소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조심스레 홍살문 아래를 지나가면 이윽고 삼성혈의 입구인 건시문 앞에 다다르게 된다. 문 바로 옆에 놓인 투박한 인상의 돌하르방 하나가 낯선 방문자를 반겨주었다.

삼성혈 경내로 들어서니, 높이 솟아난 나무들이 가장 먼저 시선을 압도했다. 하늘을 뒤덮을 듯 자라난 나무가 숲을 이루었고, 그 아래에 놓인 산책길이 마음을 푸근하게 했다. 높이가 족히 15m 이상이될 만한 거대한 곰솔도 10그루가 넘어 보였다. 번잡한 제주 도심 속에 이처럼 오랜 시간을 머금은 숲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1964년 6월에 사적 제134호로 지정된 삼성혈은 제주 원주민의 발상 지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은 삼신인이 태어났다는 세 개의 혈(穴, 구멍)이다. 성역화되어 있는 경내의 한가운데를 살펴보면, 바닥에 구멍 세 개가 뚫려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곳에서 탐라국의 시조인 고(高)·양(良)·부(夫)씨의 시조인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 乙那)의 세 신인(神人)이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설화에 따르면 삼신인은 수렵생활을 하며 살다가 이후 동쪽 바다로부터 오곡의 씨앗과 가축을 가지고 온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각각 맞이하여 혼인하였다 전해진다. 제주 원주민 사회가 수렵에서 농경사회로 발전했음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혈연을 중심으로 한 제주의 부족 국가는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마침내 고대국가인 탐라국이 되었다.

삼성혈을 바라볼 수 있는 난간에서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림으로 기록하는 동안 풍경은 더욱 또렷이 보이기 마련이다. 종이 위에 조금씩 선을 더해가며 관찰하니, 주변의 녹나무와 배롱나무의 줄기 들이 일제히 세 구멍을 향해 뻗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위의 수목들이 삼신인이 태어난 성스러운 장소를 부드럽게 보듬고 있었다. 신비로운 풍경 속에서 시간마저 천천히 흐르는 듯 했다. 지역에 남아 있는 오래된 이야기를 기록하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하나의 사실을 알게 되자 다른 것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제주에 남아 있는 더 많은 이야기들을 찾아보고 싶어졌다.

■ 탐라의 이야기가 담긴 다른 공간들

혼인지의 신방굴: 온평리에는 벽랑국의 세 공주가 섬으로 첫 발을 디딘 곳으로 알려진 연혼포와 삼신 인과 삼공주가 혼인을 올린 장소로 알려진 혼인지가 있다. 특히 혼인지에는 그들의 첫 정착지인 신방굴도 둘러볼 수 있다.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혼인지로 39-22

삼사석: 제주시 화북1동에는 삼사석이라는 유적이 존재한다. 삼신인은 혼인 후 각자의 거처를 정해야 했고, 한라산 자락의 사시장올악(쌀손장오리)에 올라 각자 화살을 쏘았다고 한다. 화살들은 제각기 다른 장소에 떨어졌고, 삼신인은 그 화살이 닿은 곳에 각자의 터전을 마련하였다고 전해진다. 삼사석은 그당시 날아간 화살이 꽂힌 돌로 알려져 있으며, 제주도 기념물 제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화북일동 13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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