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제주의 모든 바다를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동쪽의 바다를 가장 그리워한다. 뜬금없는 고백이지만, 축처진 어깨로 제주에 닿을 때면 아무 말 없이 무작정 동쪽을 향해 달려가곤 했다.

제주의 동쪽 바다와 마주하고 있는 마을, 평대리와의 만남은 2014년이 처음이었다. 이제는 너무나 유명한 관광지가 되어버린 ‘비자림’을 방문하기 위해 잠시 머물렀던 것이 이 작은 마을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 수천 그루의 비자나무가 우거져 있던 비자림의 풍경은 분명 신비로웠다. 하지만 여행이 끝난 후 마음속에 유난히 오랫동안 남은 잔상은 모래투성이 마을길을 타박타박 걸으며 만났던 평대 리의 심심한 풍경들이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 후로도 매년 이 마을에 젖어들었다 떠나기를 반복했다. 작은 모래언덕과 당근 밭 사이를 살금살금 걸어 다니기를 즐겼고, 아무도 찾지 않는 고요하고 조그만 해변에 앉아 수면 위에 어지럽게 부딪히는 빛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유달리 선명한 파란색이던 동쪽 바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빨려들 것 같던 바다는 이곳이 유일했다. 어느 날 다시 평대리를 찾았을 때, 대구에 있는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온 적이 있다.

"느그 할머니 고향이라 자꾸 가는 기가."

순간 소름이 돋았다. 아버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친할머니께서 제주에서 태어나 뭍으로 건너오신 것은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마음속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마을 평대리가 바로 할머니의 고향일 줄이야.

할머니는 이 마을의 해녀셨다. 물질을 잘했던 그녀는 생계를 위해 경상도로 출가 물질을 나갔고, 와중에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었다. 육지에서의 삶은 그렇게 새로운 인연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도시로 이사 오기 전 어린 시절에는 구룡포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 집은 바다와 몹시 가까워서 태풍이 불어닥치기라도 하면 해변으로부터 굴러온 자갈이 대문 안 마당에 두껍게 쌓이곤 했다. 그 마을은 제주를 닮아 갯바위가 많았는데, 할머니는 이따금씩 까만 턱시도처럼 멋진 고무 잠수복을 입고 거침없이 집 앞바다에 뛰어들곤 했다. 휘적휘적 늠름한 걸음으로 돌아와 어린 내 키보다 더 큰 미역과 실한 전복들을 마당에 쏟아놓으셨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 마을에는 손바닥만 한 해수욕장이 있었다. 할머니는 작은 양산 하나에 의지한 채 뜨거운 모래 위에 앉아 철없는 어린 손자가 물놀이를 끝내기를 기다리셨다. 신나게 놀다 입술이 파랗게 되어 돌아와 보면 할머니의 시선은 때때로 수평선 너머를 더듬고 있었다.

그 촉촉한 눈빛이 닿아있던 곳이 아마 지금 내가 서 있는 평대리가 아니었을까.
고개를 들어 동쪽 바다를 바라보았다.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고 눈동자는 더욱 깊어졌다.

비자림
-여행자들이 평대리를 가장 많이 찾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비자림이 아닐까 싶다.
오래된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지키는 단일수종 세계최대규모의 숲으로 사시사철 푸른 삼림을 만끽할 수 있다.
(주소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구좌읍 비자숲길 55)

아일랜드 조르바
- 따뜻한 커피 한 잔과 브라우니가 떠오르는 평대리의 작은 카페.
공간이 협소한 만큼 성수기에는 왕왕 합석해야 하는 경우도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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