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제주로 향하는 50여분의 비행시간이 그날따라 유난히 더디게 느껴졌다. 벚꽃보다 한 발 먼저 봄을 알리는 노란 유채꽃을 볼 생각에 마음속이 요란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도착한 3월의 제주. 드넓은 너른 들판은 두터운 비구름 아래 촉촉이 젖어있었다. 봄비라고 하기에 너무나 차가운 그것은 산방산으로 향하는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빗방울은 축 처진 어깨 위로 떨어져 안타까움과 우울함이라는 작은 얼룩을 만들었다.

사계리에 가까워지자 시무룩했던 내 마음이 조금씩 누그러들기 시작했다. 살며시 걷히기 시작한 구름 사이로 산방산의 위엄 있는 실루엣이 드러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밥그릇을 엎어놓은 것 같이 볼록한 산방산의 곡선이 새삼 반가웠고, 조면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수직 절벽은 여전히 경이로웠다.

산방산 허리에서 용머리해안을 바라보면 왠지 제주에 어울리지 않는 외모의 서양식 범선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스페르웨르(Sperwer)라는 이름의 이 배는 네덜란드 상인 헨드릭 하멜(Hendrik Hamel)이 1653년에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漂着)한 당시 타고 온 배를 후에 복원한 것으로 현재는 하멜상선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시관 안에서는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의 생활상과 하멜이 조선에 표류해 고국으로 돌아가기까지의 험난한 여정을 확인할 수 있다. 하멜은 난파된 이후 15년이 지난 1668년이 되어서야 네덜란드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귀국 후 그가 쓴 <하멜표류기>는 한국의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유럽에 소개한 최초의 문헌이 되었다.

동서양의 예기치 못한 만남이라는 이벤트로 인상적이기도 하지만, 사계리는 여러 개의 보배를 품고 있어 다른 이들의 시기를 받는 마을이기도 하다. 동쪽의 산방산과 북쪽의 단산이 마을을 호위하고 있고, 남쪽으로 툭 튀어나와 바다를 응시하고 있는 용머리해안이 또한 시선을 붙든다.

송악산 방향으로는 제주도의 해안도로 중 최고의 조망을 자랑하는 사계 해안도로가 놓여 있는데, 이곳에서는 비취빛 바다와 그 위에 떠올라 있는 형제섬의 비경을 함께 바라볼 수 있다. 작은 마을이 품은 것 치고는 하나같이 범상치 않다. 사계리의 명칭이 고운 모래와 푸른 물이 어우러진 곳이라는 명사벽계(明沙碧溪)에서 유래했다는 이야기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 다. 비가 멎어 쾌청한 하늘 아래로 손을 흔드는 노란 유채가 마음을 상쾌하게 했다. 풀숲에 맺힌 빗방울 덕분에 신발은 계속 젖어들었지만, 홀린 듯 바쁜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새로운 계절을 알리는 노란 꽃이 그곳에 있었다. 아직은 설익은 제주의 풋풋한 봄이 그곳에 가득 피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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