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기자의 일상다반사

 

Episode 9.

또 한 번의 명절이 지나갔다. 이전처럼 엄마를 도와 명절음식을 차리진 않았지만 그 어느 명절보다 명절스럽게 보낸 2019년 한가위였다. 우여곡절 끝에 만나는 예비사위를 위해 전복, 장어, 갈비, 튀김, 갖가지 나물과 찬들을 가득 내오는 엄마의 표정이 생각보다 밝아서 다행기도 또한 고맙기도 했다.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앞으로의 명절이 설레고 기대되는 건 좋은 징조겠지?

스무 살, 부산을 떠난 이후부터 으레 명절은 버스, 기차, 비행기 등 탈것에 몸을 싣고 짧게는 1시간 길게는 12시간의 여행길에 오른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처음으로 귀향을 경험했을 때가 생생하다. 첫 해를 건너뛰고 거진 1년 만에 찾은 부산, 노포동 터미널에 내리자 눈물꼭지가 터져 버렸다. 당시 요양원에 계셨던 할머니는 내가 서울로 가는 걸 반대하셨었는데, 자주 내려오겠다는 약속을 못 지켰기 때문에 죄송해서 흘린 눈물이지 않을까 싶다. 사실 그때는 내가 왜 우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혼자만의 감성도 잠시뿐, 이내 왁자지껄 목청 높은 경상도 사투리에 ‘아, 부산이구나’ 했다. 노포동 터미널에서 다시 지하철로 50분(사상 터미널에 내리면 되는데 대학 다닐 동안은 그걸 몰라서 사서 고생했다). 서울 지하철에 비해 아담한 사이즈를 자랑하는 터라 맞은 편에 앉은 사람과 인사라도 나눠야 하나 속으로 웃는 찰나, 옆자리 부녀의 대화가 귓구멍을 파고들었다.

“내 도, 아빠는 쪼매만 무야지!”
“야, 아빠가 니 쪼무래기가? 내가 다 무뿌끼다.”
“그라믄 아빠 꺼도 샀어야지, 나뚜라~ 나뚜라고오~”

빵**이라는 샌드위치처럼 생긴 아이스크림을 두고 부녀의 귀여운 실랑이가 이어지는데 너무 오랜만에 속 시원하게 듣는 사투리에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지금은 대중교통 탑승 시 음식물을 섭취할 수 없지만, 어떤 때는 할아버지들이 담배도 피고 했었더랬다). 대화나 상황이 우스웠다기보다는 마치 내 유년시절을 보는 것처럼 익숙하고 정겨웠고, 무엇보다 처음 경험하는 귀향길에서 ‘고향’이라는 단어를 비로소 온몸으로 이해했기에 유독 기억에 남는 장면이다.

16년 서울생활 중 낯설다거나 내가 이방인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거의 없다. 어쨌거나 부산도 대도시고 그속에서 자라났으니, 사는 풍경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만, 내 집 없이 거진 1년 단위로 떠돌아 다닌 시간과, 쌈장이 아닌 소금에 순대를 찍어먹어야 하는 헛헛함(?)은 꽤나 길게 갔던 것 같다.

부산소녀로 자라 곧 서울댁이 될 나처럼, 지방에서 상경해 서울사람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마음이 부쩍 궁금한 요즘이다. 너무 당연해서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명절 기차표 예매, 버스 또는 자동차로 무한정 달려가는 시간(예전에는 정말 왕복 24시간이 걸린 적이 있다), 사투리를 쓰면 뺑뺑 돌아갔던 택시, 서울에서 좀 산다 하는 사람들의 비매너, 막상 가족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물리적 거리가 안겨주는 막막함까지… 어떻게 그렇게 잘 버티고 이겨내며 살고 있는지 말이다.

내가 부산사람인지 서울사람인지 모호한 경계 속에서 ‘다 같은 한국사람인데 뭐~’라며 굳이 선을 긋지 않고 살아 온 지난 시간들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고향의 존재감과 나의 출신에 대한 색깔이 짙어지는 것도 같다. 그걸 지켜야 비소로 ‘나’라는 사람이 완성되는 느낌이다.

부산소녀에서 이제는 서울댁으로, 타지에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모든 이들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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