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제발...... 오지마 오지마...... 내 쪽으로 오지......’ “신형 씨 뭐해? 계약서 다 정리했어? 여기부터는 항목을 별도로 하고, 띄어쓰기는 여기 말고 여기. 이거 굵은 글씨 빼, 글씨체도 바꾸고.” 직장생활이 만만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대부분 처음 하는 일이니, 서툴러서 못하거나 잘못해서 혼나는 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는 나였다. 그러나 내 26년 인생을 통해 다져 온 감정 다스리기는 입사 3개월 만에 ‘탄씨’의 횡포에 무참히 짓밟혔다. 우리의 짜증을 증폭시키고 무음욕설의 능력을 날로 키워주시는, 정말이지 이런 사람도 있구나 싶어 새삼 세상이 새롭다. 올해 마흔다섯 노총각 인사팀장. 직원들은 그를 탄내 나는 아저씨, 일명 ‘탄씨’라고 부른다. 정체를 알 수 없는 타는 냄새를 풍기고 다니기 때문이다. 하도 신기해서 재무팀 우현 대리님은 타는 냄새나는 향수, 타는 냄새 나는 방향제까지 검색을 해 보셨단다. 혹시 그런 걸 쓰시나 싶어서. 회사에서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뿐더러, 그를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 아니지, 모두가 싫어한다고 표현해야 정확하겠다.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하고, 가르치려 들고, 남의 의견은 무조건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을 누가 좋아할까. 상사니까, 중요한 업무니까, 인사팀장이니까 이해하고 넘어가려다가도 터무니없는 내용으로 시비를 걸거나 자기가 옳다고 주장할 때는 한판 붙고 싶다는 생각까지 든다. 식사나 술자리에 빠지지 않는 험담의 주인공이 되는 건 당연지사다. “누가 육하 원칙을 몰라? 자기가 국어선생님이야, 여기가 군대야, 보고할 때는 육하 원칙 순서대로 말하라고 1시간을 넘게 설교하는 인간이 제정신이냐고. 어제는 뜬금없이 복장이 불량하니 어쩌니 사람 괴롭히더니......” 나랑 입사동기인 구매팀 최 대리님은 점심시간에도 밥보다 뒷담화다. 최근 인사팀장과의 불화가 잦고 슬슬 언성을 높이는 단계로 접어들고 있어 혹 최 대리님이 일을 크게 벌여 공식적으로 인사팀장을 퇴사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크다. 사실 아직 짬밥이 안 돼서 그렇지 나도 인사팀장의 업무능력,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 등 많은 문제점을 계속 언급하며 이대로는 안 된다는 분위기를 지속적으로 형성하고 있는 주축이다. 일터에서 일이 아닌 사람과의 전쟁이라니, 사회생활이 이런 거였구나. 긴 출장을 마치고 돌아오신 본부장님과의 저녁 회식에 한 명의 적군을 둘러싼 아군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다행히 적군은 자리에 없으니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마치 막장 드라마 한 편 써내 듯 흥분의 도가니를 만들고 본부장님은 그런 분위기를 뭔가 결심이라도 한 듯 단호한 눈빛으로 호응해 주신다. “나도 이 문제를 오래 고민했고 그래, 공론화할 때도 됐지. 썩은사과 맞다. 그대로 두면 멀쩡한 것들도 시들어 나자빠지겠지”. 우리는 눈빛을 교환하며 이긴 경기를 축하하듯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하긴, 누가 봐도 빤히 보이는 잘못인데 본부장님이라고 모르실까. 아무래도 회사 입장에서 해고는 좀 껄끄러운 일이니 다들 몸 사리고 무시하며 지냈던 거다. 저렇게까지 말씀하시니 어떻게 풀려도 풀리겠지. “그런데 본부장님, 한 팀장님 여기 입사했을 때부터 쭉 보셨고 가끔 술도 같이 드신다면서요. 저희야 이래저래 악감정이 쌓여서 그렇다지만 본부장님 보시기엔 어떠세요?” 한 사람의 단점, 잘못을 죽어라 끄집어내다 보니 뭔가 마음이 찝찝해서일까, 이상하게 인사팀장에 대한 질문거리들이 생겨났고, 끝을 모르고 이어지는 술잔과 함께 이야기는 아주 자연스레 한 남자의 인생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한동식, 외동아들. 아버지는 어릴 때 일찍 돌아가시고 어머니랑 단 둘이 40년 가까이 살고 있는 노총각. 법대 고시공부 중도포기하고 이런저런 회사 전전하면서 인사담당으로 경력은 쌓이는데 도통 인간관계, 사람 대하는 법은 제대로 배우질 못한 어설픈 사람. 3년 전쯤 발병된 어머니의 치매 간병으로 딴짓은 꿈도 못 꾸고 하루하루 살아가는 남자. 우리가 그토록 증오하고 몰아내려는 인사팀장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침마다 김 구워 어머니 밥상 차리는 놈이야 그놈. 언젠가 한 번 김을 안 구웠는데 그걸 어떻게 아셨는지, 김 굽는 척이라도 해야 무사히 출근한단다. 안 그러면 소리치고 발작증세 보이시니까. 간병인 비용도 만만찮고, 있다고 해도 살림은 지가 해야 하니까. 안 그래도 고지식하고 공부만 한 놈이 뭘 알아서 제대로 하겠냐. 온 집에, 옷에 냄새가 배이든 말든 신경이나 쓰겠냐 말이다. 근데 이 답답한 자식, 명색이 인사팀장이니 직원들이랑 잘 어울려 지내고 말투도 좀 고치라고 수 없이 말을 해도 안 들어먹어 사람 죽겠다. 진짜 내보내는 게 답인 건지...... ” 직장생활이 왜 개인사와 연결되냐고, 그 사람 인생이 일이랑 무슨 상관이냐고 따져 묻고 싶다가도 이상하게 죄 짓는 것 같아 다들 입을 다무는 듯했다. 그는 분명 적합하지 않은 언행으로 다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이었다. 우리는 욕을 했다. 조직의 썩은 사과라며, 그저 사라져주기를 바랐다. 문제는 내가 욕을 했던 부분이 단순히 직장생활에서 그가 보인 잘못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어쩌면, 한 사람의 인격과 인생 전체를 마치 통으로 쓰레기 취급한 것이 아닌가 하는 거다. 상대가 왜 그런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나 혹은 서로의 대화에서 문제는 없었는지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지고 바라봤더라면 어땠을까. 고등학교 다닐 때 문제아 한 명을 반 전체 아이들이 단합하여 자퇴시킨 적이 있다. 승리에 도취된 아이들 앞에 서서 눈물을 흘리셨던 가정 선생님의 말씀이 내 머리를 세게 내리친다. “학생이 이토록 잔인한데, 너희가 사회를 나가 어른이 된다고 생각하니 선생님은 무섭다. 1부터 10까지 사람의 등수를 매기고 10은 나쁘니 몰아냈다고 치자. 그럼 과연 10이 사라질까? 아니, 1부터 9까지 중에서 다시 9를 없애자고 하겠지. 결국 남는 건 없다. 모든 잘못은 정도의 차이고 누구나 남에게 피해를 주며 사는데, 그걸 잘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지 어떻게 머리 맞대고 몰아낼 생각을 할 수가 있니?” 당시는 콧방귀 끼며 흘려들었던 말, 그러나 동일한 문제를 또 똑같은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나와 우리의 태도가 어떠한가. 직장, 사회라는 공간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는 과연 어른답게 다루고 있나? 대학을 가면, 더 많이 배우면, 더 좋은 직장을 가면 달라질거라 믿었던 것들 중에서 가장 큰 배신은 바로 ‘나’ 자신이다. 여전히 정체된 채로 좁은 마음에 머무르는 생각. 철 없던 시절, 영웅담같던 이야기가 갑자기 숨기고픈 과거가 되는 것도 한 순간이구나. 며칠째 인사팀장님(그러고 보니 글을 쓰는 동안에 ‘님’이란 존칭도 쓰지 않았다니, 나도 어지간히 맺힌 게 많았나 보다.)에 대한 얘기가 뜨거운 감자다. 아직 본부 사람들밖에는 모르지만 가정사가 드러나면서 공격의 방향이 살짝 변했다. 단순히 동정론으로 그분의 잘못을 덮을 수는 없는 일. 다만,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 단편적인 정보와 시각으로는 참 어렵다는 점을 서로 공감하면서 까칠하고 대책 없는 한 사람을 좀 더 인간적으로 공격하자고 입을 모으는 중이다. 최 대리님은 여전히 불만사항을 뒷담화로 털고 계시지만 어쩐지 눈빛은 좀 애잔해진 듯하고, 이야기를 공유한 직원들도 측은지심 때문인지 예전보다 스트레스는 좀 덜 받는 것 같다. 약간은 변화된 지금의 상황에서 더 나아질 방법은 없는 걸까. 조직관리나 직원교육 관련해서 사내강사를 두거나 외부강사를 자주 초빙해도 사실상 직원들 간에 서로 얽히며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심리적인 접근은 잘 안 되는 것 같다. 회사에 심리치료사가 있어서 직원들 개인 고민도 들어주고 팀, 부서간의 문제도 원만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주면 참 좋겠다. 그분의 업무스타일에 적응하면서 나는 인사팀장님을 조금이라도 변화시킬 수 있을 거란 막연한 희망을 펌프질하고 있다. 누군가 애써야 한다면 조금이라도 젊은 내가 해야겠지. 괜히 먼저 질문도 하고, 뭐라고 간섭하실 때는 웃으며 받아치는 것도 연습 중이다. “한 팀장님, 봄이라 그런지 향긋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아요.” “뭐? 타는 냄새는 아니고? 나 지날 때마다 타는 냄새 난다며.” “헤헤, 팀장님은 봄을 태우시나 보죠. 커피 한 잔 드릴까요?” 관계의 형성과 회복, 사회에서 배우고 터득하는 가장 고급 기술을 나는 오늘도 갈고 닦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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