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 시무식 행사에서 우리 회사 밴드 동호회 ‘걸리버마이크’는 열정은 기특하나 고통 주는 연주 실력으로 임직원들의 웃음거리가 된 뼈아픈 기억이 있다. 그 후 몇 달이 지난 요즘, 작은 술집에서 연주회를 열어 그 날의 눈물을 씻어보고자 준비가 한창이었는데 키보드 담당인 영업 2팀 이준성 과장님이 오늘 아침 팔에 깁스를 하고 나타나셨으니, 아무래도 그들의 설욕전은 또 연기될 모양새다. “이 과장 뭐냐?” “주말에 야구하다 공에 맞았는데 살짝 금이 갔네요. 금방 붙겠죠 뭐.” “당신 팔 붙고 안 붙고가 문제가 아니라 같이 하는 활동인데 신경 좀 쓰지. 장소 대여도 문제고 또 다시 전원 날짜, 시간 맞추기가 보통 일이냐고. 공연 앞두고는 주말 야구놀이는 한 두 주 쉬지 거 참......” 비록 보컬과 합주는 형편없는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 과장님의 키보드 연주에는 다들 찬사를 보냈었다. 얼핏 듣기로 고등학교 때까지 재즈피아노를 배웠다는데, 직장인이자 다섯 살 꼬맹이 아빠인 그가 주말에는 야구선수가 된다는 사실은 오늘의 뉴스. 솔로인 나조차도 하루 24시간이 모자라 뭘 해볼까 싶어도 포기하기 일쑤인데 도대체 시간, 열정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남들 보기엔 칭찬과 부러움, 찬사를 한 몸에 받는 주인공 같지만 모르긴 몰라도 아내 분과의 엄청난 다툼은 예상 가능한 일이다. 영업직이라 술자리도 많을 텐데, 낮엔 일하고 평일 밤엔 회식 아니면 키보드 연습, 주말엔 야구라니 ‘가족과 함께 보낼 시간만 없지 않을까’ 싶은 게 여자 입장에서 괜히 화가 난다. 어울려 하는 활동도 좋지만 뭐든 지나치면 피해가 가는 법! 깁스한 팔을 보고 있자니 은근 쌤통이다. 우리 회사에는 밴드 동호회 말고도 볼링 치는 ‘공사랑’, 한 달에 한 번 산을 타는 ‘산술바람’까지 총 세 개의 동호회가 활동 중이다. 회사의 공식적인 지원이 없기 때문에 각자 사비를 털어 하는 그야말로 순수한 사적 모임이지만 나름 꾸준하고 성실하다. ‘산술바람’은 산을 타는 목적 절반에 술 마시고 노는 일이 절반이라 가끔 입방아에 오르내리지만. ‘왜 동호회명이 그러한지 알 만하지.’ 7월 여름을 맞아 수상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 몇몇이 모일 움직임까지 있으니 곧 동호회가 늘어날 것 같다. “신형, 여름 물놀이 좀 해? 수상스키는 여자들도 엄청 많이 타. 생각보다 안 위험해. 뭉쳐서 가면 비싸지도 않아. 경치 좋은 곳에서 맛난 것도 먹고, 혹시 알아! 거기 스포츠 즐기는 사람들 중에 신형씨 짝도 있을지. 수영 못해도 괜찮아 구명조끼는 괜히 있냐고, 알아서 둥둥 떠. 응응? 같이 하자 신형 씨......” 수상스키에도 별 관심 없지만 노처녀 최 과장님이랑 주말 여가시간까지 함께 보내며 그 기나긴 인생사를 반복 청취할 바에야 차라리 사무실 출근을 자청할 나다. 한동안은 그녀의 구애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날씨보다 내 마음이 더 덥구나. 사실 누가 권해서가 아니라 진작부터 동호회는 하나쯤 해보고 싶었다. 대학 다닐 때 편하게 술 마실 핑계거리로 가입했던 영자 신문 동아리를 제외하고는 딱히 좋아하는 일을 여럿이 어울려 해본 적이 없다. 자전거에 빠져 거의 매주 주말을 동호회에 올인해 지내는 친구 진희만큼 미쳐버리지는 못할지언정, 일과 잠으로 찌들어가는 내 청춘을 구제할 방법을 동호회에서 적당히 찾아봐야겠다. 이 과장님 수준까진 아니더라도 나도 일반인 치고는 피아노를 나쁘지 않게 다루니까 이번 연주에 대타로 뛰면서 간이나 좀 볼까? “이거 전체 악보야. 일단 늦게 합류했고 연주회까지 시간이 별로 없으니까 집에서 연습 많이 부탁해. 되도록 평일 저녁 때 같이 모여 연습할 테지만 안되면 개인적으로라도 맞춰놔야 해. 이참에 아예 멤버를 신형 씨로 바꿀까 보다. 팀 분위기도 살잖아.” 밴드 리더인 고객지원부 현동민 팀장님으로부터 이런저런 자료와 지시사항을 듣고 집에서 연습에 한창이다. 곡 수만 무려 열 개. 낮은 실력 고려해서 네댓 곡만 부지런히 연습하시지 욕심 많은 사람은 뭘 해도 넘친다. 평일 저녁시간 같이 연습한다고 해도 연주회 당일까지 시간이 많이 부족할 것 같은데 일단 해봐야 알 일이다. 밴드 연주회 소식과 5명의 멤버로 시작하는 수상스포츠 동호회 ‘물수제비’의 창단식까지 올 7월은 사내에 뭔가 신나는 기운이 돌고 있다. 업무 스트레스와 동료 험담으로 가득했던 직원들 수다에 동호회 비중이 확실히 늘어난 것도 긍정적이고, 무엇보다 회사 차원에서 동호회 비용 지원이 있을 거란 소문에 다들 귀 기울이고 있다. 만약 공식적인 지원이 이루어지고 개인의 비용부담이 준다면 좀 더 많은 직원들이 취미생활과 못 다 이룬 꿈을 위해 참여하겠지. 직장에서 겪는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가 개인의 문제에서 가정, 사회로까지 연결되어 적잖은 문제를 일으킨다는 얘기는 굳이 학자들이나 연구진이 떠들지 않아도 모두가 공감하는 일. 개인의 문화, 여가생활을 직장으로 들여와 장려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정부차원에서 사내 동호회 활성화를 위해 지원을 확대하고 있고 그에 따라 회사들도 활동을 적극 권장하여 임직원 스트레스, 우울증 관리에 신경 쓰고 있다. 이로써 회사라는 틀을 이용해 스트레스를 줄이고 자아실현을 이어가는 직장인들이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란다. 과중한 업무량을 조절하고 불필요한 회의, 언쟁, 뒷담화가 줄어드는 직접적인 해결이 우선되어야겠지만 조금 다른 방식으로라도 우리들의 스트레스를 줄여주려는 의도가 고마울 따름이다. 더불어 점점 죽어가는 나의 관심사에 다시 한 번 불씨를 살려 참여의지를 키워주고 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어머 이 과장님, 팔에 그게 뭐예요?” “우리 아들 그림솜씨, 죽이지? 이게 야구공이래. 근데 집에서 손에 잡히기만 하면 죄다 집어 던져서 큰일이야. 야구장을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었어......” 깁스에 알록달록 낙서가 가득한 그의 팔은 자신의 취미나 꿈만이 아니라 가족도 늘 함께라는 걸 나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아뿔싸. ‘쌤통이라고 욕해서 죄송해요. 이 과장님, 피아노도 야구도 계속 파이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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