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어느 아픈 날에

미스 김 다이어리

2014-09-30     김소정 월간 인재경영 객원기자

식전, 식후, 간식, 회의용까지 오늘 하루 동안 커피만 네 잔째다. 그것도 매우 진하게. 학교 다닐 때도 커피가 좋아 커피숍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지만 직장생활을 시작하고부터는 이게 맛이 좋아서 마시는 것인지 단순 중독인지 살짝 헷갈리기 시작한다. ‘내일은 줄여야지, 줄여야지’ 하면서도 늘어가는 커피값은 이제 한 달 교통비를 훌쩍 넘어서니, 코딱지만한 월급에 생계가 위협받을까 심히 걱정이다.

나의 커피사랑 못지않게 재무팀 이 대리님도 책상 가득 사랑을 전시하고 계시니, 바로 ‘건강식’이다. 알약, 일회용 즙, 가루, 캔디 등 종류도 어찌나 다양한지, 얼마 전엔 ‘뉴’로 시작하는 건강보조 식품을 6개월 치 샀다며 하나씩 맛보라고 주기도 하셨다(알약이라 딱히 맛 볼 것도 없이 꿀꺽했지만). 내가 때를 거르지 않고 좋아하는 커피 브랜드를 찾듯이, 그는 마트 건강식품 코너를 즐겨 찾으며 점심시간에도 인터넷 건강식품 쇼핑몰이 놀이터다. 술, 담배 중독은 해롭지만 건강식품은 중독 자체가 좋은 거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는 모습이 거의 종교 수준이랄까? 실제로 회식 다음 날에도 쌩쌩한 걸 보면 ‘좋긴 좋은가, 나도 좀 먹어봐?’ 혹하는 게 사실이지만, 이사님은 이 대리는 본래부터 간이 독한 놈이니 말만 듣고 동참하지 말라신다.

9월부터 늦더위에 일교차가 크더니, 10월의 어느 날은 회사 전체가 훌쩍이는 비염 환자들로 난리도 아니었다. 약 100여 명이 파티션으로만 부서와 구역을 나누어 근무하고 있다 보니 봄, 가을 환절기는 모두에게 공포가 되어버렸다. 비염으로 인한 훌쩍거림, 재채기, 코 푸는 소리, 그 때문에 갑갑해서 쉬는 한숨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통제 불가능한 소음이 무려 스무 명이 넘는 사람들로부터 합창하듯 뿜어져 나왔으니 예민한 마케팅 실장님이 소리를 내지를 만했다.

“거참들, 화장실 가서 코 풀고 정 안되겠으면 회의실 가서 일하지. 이거 여러 사람 같이 피곤할 필요 있어?”

쩌렁쩌렁 울린 목소리에 수 초간 정적이 흘렀고, 비염 환자들이야 섭섭하고 마음 아프겠지만 나머지 80여 명은 은근 총대를 메어주셔서 감사하다는 표정을 실장님을 향해 날리고 있었다. 몇몇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고, 또 몇몇은 억지로 참아서인지 소음은 확연히 줄어들었다. 우리 이사님은 그 사건 이후 각 부서장을 소집해 대안이 없을지 논의하셨고 총 두 가지 아이디어가 채택되어 11월까지 진행될 예정이다. ‘비염, 안구건조증 진료비 지원’과 ‘회의실근무제’인데 비염만 지원하자니 안구건조증 얘기도 많이 나와서 추가되었고 회의실 근무제는 비염 증상이 심할 경우 일할 수 있도록 책상과 노트북, 사무용품을 구비해두었다. 증상 없는 사람들에게는 간식비와 휴식시간을 지원해달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했지만 아무튼 직원들 사이에 반응이 좋다.

“직장 다니면서 일상질병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 죄다 환자지. 코, 눈, 위, 장, 손목, 목, 허리 이중에 하나는 무조건이다. 공기나쁘고 건조하니 호흡기 난리 나고, 정신적 스트레스에 먹는 거 부실하고 그 와중에 술을 채우니 위랑 장이 탈나고, 종일 앉아서 컴퓨터에 전화기 쥐고 사는데 손목, 목, 허리에 이상이 없을 수가 있냐고. 참, 하나 더 추가하자. 탈모!”

“야 이우식, 넌 적어도 탈모 걱정은 없겠다.”
“너무 넘쳐서 탈이죠!”

머리숱이 많아 별명까지 ‘다모(多毛)’인 마케팅팀 우식 씨가 탈모 얘기에 반응하니 순간 웃음바다가 됐다.
누구의 말처럼 직장 다니면서 아무 탈 없이 건강하기란 쉽지않다. 설령 몸에 이상이 없다 하더라도 나처럼 커피를 달고 살거나, 초콜릿이 식사대용이 되는 등 과거엔 없던 이상증세, 중독현상이 난무하고 있다. 앞서 고민했던 것처럼 예전엔 ‘좋아서’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지만 요즘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도 되고, 아무 의식 없이 습관처럼 먹고 마시기도 한다. 병적 증세든, 선택에 의한 것이든 뭔가 하나는 달고 살아야 하는 우리라니 어째 서글퍼진다.

일요일 친구 결혼식장에서 먹은 음식에 문제가 있었는지 설사와 변비를 오가며 일주일이 다 되도록 괴롭다. 공짜로 하는 다이어트야 고맙지만 안 되겠다 싶어 병원을 찾았더니 대장기능이 많이 떨어진 것 같다며 이런저런 식습관 개선과 약물 처방을 받았다.

“아가씨 말이죠, 몸에 면역이 떨어지면 어떻게 되는 줄 알아요? 세균이 몸에서 자라요. 슈퍼 박테리아 알죠? 이거 엄청 무섭습니다.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몰라요.”

참나, 배 조금 아픈 것 가지고 엄청 겁을 준다. 누가 그 속셈 모를 것 같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걱정은 되니 선생님 말씀은 일단 따르고 봐야지. 당장은 커피부터 줄여야 하고 자극적인 음식도 피하란다. 의무적으로 커피를 줄여야 할 때가 왔다니, 손이 떨리고 입이 마르는 증세가 찾아온다면 나는 중독자로 판명 나겠지.

“어, 신형 씨 어디 아파요?”
“병원 갔다 왔어요?”

약국에 들어서는데 마케팅팀 한 대리님이랑 마주쳤다. 너무 구체적인 질문에 솔직하게 말할 정도의 친분은 아닌지라 대충 둘러댔다. 그 역시나 비염으로 10월 내내 병원 신세라고. 처방전을 접수하고 기다리는 동안 진열장 가득한 약들과 현란한 광고문구를 읽으며 우리는 알게 모르게 공범자가 되어 약병 하나씩을 집어 들었다. 대리님은 호흡기 질환에 좋은 걸로, 나는 장에 좋은 유산균을 샀다. 옷이나 액세서리 쇼핑을 할 때는 뭔지 모를 약간의 죄책감이 드는 반면 건강식품은 ‘몸에 좋은 거니까, 좋은 일이니까’ 하는 생각이 마구 들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재무팀 이 대리님이 이 맛에 구매하시는구나!’ 공감이 가는 대목이다.

내 몸의 병과 고통이 기분 좋은 쇼핑으로 연결되는 웃지 못 할 10월의 어느 아픈 날이 비단 나에게만 찾아오는 것은 아니겠지. 현대인은 크고 작은 환자, 중독자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고 회사는 그들을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회사뿐 아니라 본인 스스로도 모르거나, 알아도 그러려니 한다.

“모르는 게 약이야.”

직장인 건강검진에서 간수치가 너무 높아 재검을 받으라는 통보에 누군가는 재검 받기를 포기했다. 모르는 게 약이라니, 독을 키우는 습관은 다른 게 아니라 마음에 있다. 10월의 어느 멋진 날,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기 싫다면 더 아프기 전에 스스로를 돌보는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