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시황의 성과주의를 생각하다

전영민의 세상보기

2016-02-02     전영민 롯데인재개발원 인재경영연구소장



 550년에 걸친 혼란 끝에 서쪽의 후진국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했다. 전통적인 강자들을 무너뜨리고 말이다. 비결이 뭘까? 많은 사람들이 그 비결로 법가적인 전통을 이야기한다. 맞는 것 같다.
 진나라는 고리타분한 예(禮)를 과감하게 버리고 빠르고 효율적인 법(法)의 체계를 받아들였다. 예의나 염치도 없이 서로를 죽이는 전국시대에는 법이 최상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국가 전체를 법이라는 끈으로 팽팽하게 묶은 진나라, 이후 진나라는 재상도 귀족도 할 것 없이 철저하게 법의 지배 아래에 두었다. 당연히 조직의 군살이 빠지고 효율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그리고 확실한 ‘신상필벌’을 도입했다. 일개 병사라도 전쟁에서 공을 세우면 반드시 포상을 했고, 재상이라고 하더라도 죄를 지으면 똑같이 벌을 주었다. 이런 신상필벌과 성과주의는 상앙(商鞅) 이라는 경력사원이 제시한 룰이다. 상앙은 자신을 무시하는 고향 위나라에 실망했다. 제대로 열 받은 상앙은 진나라가 출신과 관계없이 널리 인재를 구한다는 ‘경력사원 모집 공고’를 보고 지원서를 냈다. 그리고 진나라를 강력한 신상필벌과 성과주의가 지배하는 국가로 만들었다. 효율로 무장한 진나라는 이내 위나라까지 삼켜버릴 정도로 힘이 세졌다. 결국 위나라의 왕은 천거된 인재 하나를 비웃었다가 나라를 망친 셈이다.

 상앙이 도입한 변법은 단호하고도 과격했다. 먼저 모든 가구를 5가구, 10가구로 편성하는 ‘십오제(十五制)’를 도입했다. 확장된 팀제인 대부대과제를 도입한 셈이다. 그리고 그 그룹 내에서 범죄가 발생할 경우 그룹 전체를 처벌했다. 범죄가 발생했음을 알고도 고발하지 않을 경우에는 허리를 자르는 요참형에 처하고, 고발을 했을 때는 상을 주는 가혹한 제도를 도입한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를 감시해야 하는 살벌한 체계가 도입된 후 진나라에서 위법이나 범죄 행위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 다음은 직급제도를 개편하고 성과주의를 도입했다. 신분체계를 20등급으로 세분화해서 나누고 귀족들의 세습 특권을 없애버렸다. 전쟁에 나가서 공을 세우면 명확한 KPI에 따라 평가하고 정확하게 신분 간의 승격에 반영했다. 비록 귀족일지라도 별다른 공이 없으면 신분을 박탈하고 토지도 회수해버렸다. 그렇게 창출 한 성과에 따라 신분이 재결정되고, 그 신분에 따라 토지와 집, 노비의 수, 옷의 종류까지 차등을 두었다. 결국 놀고먹던 귀족들도, 신분 상승을 원하는 평민들도 적극적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자 진나라 군대는 막강해졌다. 내가 전사를 한다고 해도 남아있는 내 가족들은 훨씬 높은 신분으로 승진을 하게 되고 호위호식을 하게 된다? 그거 정말 괜찮은 보상 방식 아니겠는가? 그래서 다른 나라 근대와는 완전한 차별화가 이뤄졌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그 상앙이 자신이 만든 법의 덫에 걸려 죽게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후원자였던 진나라 효공이 죽자 찬밥신세가 되었던 귀족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귀족이라는신분을 빼앗아버린 상앙이야말로 그들에게는 철천지원수였으니 지극히 당연한 것 아니겠는가? 더구나 상앙은 차기 왕이 태자이던 시절에 저지른 잘못을 적발하고 태자 선생의 코를 베어버린 전력이 있었다. 그때 태자도 왕에게 불려가서 열나게 터진 건 불문가지일거고. 살기 위해 급하게 도망을 가던 상앙은 성문지기의 철저한 준법정신에 막혀 성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추격대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 준법정신과 성과주의가 부국강병을 불러오자 제도는 당연히 강화가 되었고, 나라를 움직이는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대신에 유연성은 완전히 사라졌다. 진나라의 백성들은 두려움 때문에 움직였지만 충성심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얼마나 유연성이 없어졌냐면, 당시 최고의 협객이라던 ‘형가’가 연나라 사신으로 와서 단상 위에서 진시황을 죽이려고 단검을 들고 달려드는 일이 벌어졌다. 이 와중에 경비병들이 달려와서 진시황을 구하지 못했다. 진나라 법에 무기를 들고 그 단상 위에 올라가면 무조건 사형이었기 때문이다. 왕이야 죽든 말든 일단 나는 법에 걸려서 죽고 싶지 않으니 옆 사람 눈치만 본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지나치게 규칙과 법에 의존하는 성과주의는 이런 어이없는 결과를 불러올 수 있는 법이다.
 어찌되었던, 법률주의와 성과주의는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에는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진짜 아이러니한 대목은 중국전역을 통일한 이후 그 법률주의와 성과주의가 진나라 패망의 가장 큰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천하를 제패한 후 주나라와 같은 봉건제를 실시하자는 제의를 거절한 진시황은 전국을 36개의 군현으로 나누고 관료들을 파견했다. 그리고 모든 결정권이 자신에게 집중되도록 만들었다. 그는 태생부터 아무도 믿지 못하는 불신의 화신이었다. 당연히 모든 걸 자신이 결정하려고 하니 사상 초유의 하드워커, 워커홀릭 황제가 탄생했다. 당시에는 종이가 없어서 모든 문서를 죽간(대나무를 얇게 쪼갠 것)에 기록했는데, 진시황은 자신의 컨디션과 관계없이 하루에 일정 무게의 문서를 검토한 후에야 휴식에 들어 갔다고 한다. 그러니 신하들은 어땠을까? 매일처럼 야근과 철야를 하지 않을까? 진시황은 무서운 집중력을 보유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게 진시황 같은 독종에게나 가능한 일이겠고 고생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자식 대에도 그게 가능할까? 당연히 의사결정의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졌고 현장이 아무리 급해도 황제의 재가가 없이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당연히 목이 떨어지게 생겼으니 모든 관료들이 황제만 쳐다보고 있었다. 게다가 예를 폐지하고 법만 세워두는 바람에 목숨을 걸고라도 당연히 해야 한다는 충성심이라는 가치관이 사라졌다. 나라야 망하든 말든 나부터 살아야겠다는 극도의 공포감? 그게 진나라의 법치주의와 성과주의가 만든 결론이었다.

 지금은 상하이 옆쪽에 있는 동남쪽 오랑캐 땅 패현에서 동네건달을 하다가 파출소장(亭長)을 하던 촌놈 유방이 일어나서 천하를 빼앗고 422년 동안 제국을 유지한다. 진시황과의 차이점? 그건 바로 ‘왜’라는 것에 대한 대답이 있는가 없는가에 있었다. 진시황은 ‘왜’ 천하통일을 했나? 혼란과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무려 550년 동안 끌어오던 건데?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혼란과 전쟁이 끝난 다음에 ‘왜 진시황이 계속 통치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내놨어야 했다. 그렇게 보면 진시황은 본인의 확장욕구, 천하에 자신을 입증하고 싶어 하는 욕구에 쫓겨 천하통일을 한 것이다. 그런 명분에 진시황 자신은 몰입을 할지 몰라도 다른 사람은 전혀 아니다. ‘진나라 영토의 최대화’라는 진시황의 이념을 좀 더 현대적인 개념으로 설명하면, ‘주주 이익 극대화’이다.

 반면 양아치인 유방은 달랐다. 가혹한 법률이 가져온 폐해와 진시황의 혹정에 시달리는 백성을 구하겠다는 명확한 명분이 있었다. 유방에게 하늘을 대신해서 천하 만민을 구하겠다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에 탁월한 항우보다 더 많은 인재들이 몰려들었다. 그리고 유방은 그물망처럼 복잡한 진나라의 법률을 폐지하고 정말 간략한 법률만 제시했다. 그렇게 전 중국인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상당히 오랜 세월 동안 한(漢)나라를 이어가는 기틀을 만들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 있지만, 말 위에서 그 천하를 지킬 수는 없다”는 게 유방의 고사이다. 촘촘하고 철저하게 설정된 규정에 따른 처벌, 철저한 KPI에 따른 성과주의, 금전적 보상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주주자본주의…

 진시황의 성과주의, 2200년 전에 중국 전체를 놓고 벌인 거대한 실험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나는 이 고사를 읽으면서 왜 이게 그리 오래된 옛날이야기가 아니라는 착각이 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