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과 분배에 대한 일 단상

김은경의 시사터치

2016-10-28     김은경 경기연구원 선임연구위원

대통령 선거가 내년으로 다가오면서 정치권을 중심으로 성장과 분배에 대한 논의가 격렬해질 것이다. 1997년과 2008년 두 번의 경제위기를 겪으면서 소득불평등을 포함한 사회적 불평등은 한국의 핵심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되었고 지속적으로 정치적 화두가 되고 있다. ‘갑질, 헬조선, 금수저, 흙수저’ 등의 유행어는 사회적 불평등의 심화에 따른 국민들의 불만을 표현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같이 이른바 ‘기득권층’인 부자나 정치인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부족하고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공정한 경쟁보다는 특권만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갈등과 불만은 불가피한 측면도 있다.

성장과 분배는 시장경제에서 효율성과 형평성의 조화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은 그럴듯한 정치적 슬로건이지만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목표이다.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위해서는 생산성, 임금, 이윤이 모두 증가하고 이를 통해 내수와 투자가 활성화되어야 한다. 우리나라의 개발연대와 서구 선진국들의 2차세계대전 이후 황금기가 대표적인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 시기였다. 개발연대에는 독재정권의 폭압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파이가 급속하게 커지면서 불평등은 존재하였지만 그래도 각자 자기 몫을 얻을 수 있었다. 서구 선진국들은 성장의 과실로 기업은 막대한 이윤을 챙겼고 근로자들의 임금은 상승되었고 복지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자본주의가 성숙된 경제에서 이러한 선순환이 발생하기는 거의힘들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표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정치권에서는 성장과 분배의 선순환을 표방하는 많은 논의가 있었다. 2012년부터 본격화된 경제민주화란 용어는 성장도 분배도 아닌 구체적인 알맹이가 없는 정치적 구호에 불과하다. 재벌을 규제하여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자는 것이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의 의도로 보이지만 이는 단지 반독점 정책에 불과하다. 경제민주화가 한국 경제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내용은 없다. 경제민주화가 시장경쟁의 활성화를 돕고 대기업들의 불공정행위를 제어하는 목적이라면 이는 시장경제의 발전을 위해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시장경제의 실패를 정부가 나서서 규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은 결국 관치경제의 강화로 관료들의 밥그릇만 키우고 오히려 시장경쟁을 제약하고 효율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낳기 쉽다. 더군다나 이러한 구호가 정치적으로 이용된다면 불평등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를 자극하면서 인기영합적인 규제만 남발할 수 있다.

2015년에 한창 이야기가 나왔던 임금소득의 증가를 통한 소득(임금)주도 성장론은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한국과 같은 개방경제에서는 작동하기가 어렵다. 개방경제에서 근로자의 임금상승은 제품가격을 상승시켜 자국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저하시키고 저렴한 외국산 제품의 수입을 증가시킨다. 수출상품의 경쟁력은 저하되고 기업경쟁력은 약화되어 경제성장을 둔화시킬 우려가 크다. 무원칙한 임금인상은 새로운 일자리 창출도 어렵게 만든다. 지금과 같이 가계부채가 많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커서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기가 어려운 상황에서 소득 증가는 단기적으로는 부채상환이나 저축을 유도하여 내수 활성화도 달성하기 어려울 것이다. 결국 소득주도 성장은 단기적으로나 중장기적으로 한국 경제에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올해 들어서는 이른바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스위스가 세계 최초로 기본소득의 도입 여부를 국민투표에 부쳐 부결시키면서 많은 국내 언론들이 기본소득을 앞다투어 다루었다. 기본소득은 모든 사회 구성원에게 균등하게 일정액을 지급되는 소득으로 상당히 매력적인 제안으로 보인다. 문제는 범죄자든 외국인이든 소득이 얼마이든 일정 기간 자국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국가가 일정액을 매월 지급할 만큼 재정 여력이 있는가이다. 더욱이 기본소득은 세금을 내는 국민 입장에서는 세금을 환급받는 것과 큰 차이가 없다. 국가가 사용할 수 있는 재정지출은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 기본소득이 도입되면 저소득층에 대한 복지혜택은 줄어들 수밖에 없는 것도 한계이다. 기본소득보다 오히려 전 국민의 세금을 깎아주는 것이 더 바람직해 보이기도한다. 기본소득제도를 도입하기 위해서는 증세가 불가피할 것이다.

결국 성장과 분배를 모두 달성하기는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경제가 발전할수록 소득격차가 누적되면서 빈부격차가 커지는 것이 일반적 경향이다. 원래 형평성이나 평등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소득을 얻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능력과 노력에 상응하여 자기 몫의 분배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능력과 일하는 정도가 모두 다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동일한 소득을 받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노력하지 않은 사람이 노력한 사람과 동일한 소득을 얻을 수 있는 사회야말로 불평등한 사회이다. 사적 소유권에 기반을 둔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각자 갖고 있는 재산도 다르기 때문에 기회 자체가 불균등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과도한 소득격차나 자산격차는 근로의욕을 약화시키고 사회적 갈등을 유발하며 범죄 등의 사회적 문제와 정치적 불안정을 야기하여 경제성장에 부정적 영향을 준다. 따라서 시장경쟁이 달성할 수 없는 재분배를 위해 정부의 일정한 역할이 필요하다.

문제는 시장경제에서의 소득불평등을 가장 부자인 사람과 가장 가난한 사람의 빈부격차로 보는 잘못된 관점이 횡행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부자인 사람에게는 그에 맞게 조세를 투명하게 부과하면 되고 빈곤층에게는 적절한 사회복지 지원을 하면 된다. 소득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한 실질적인 정책은 중산층을 많이 만드는 것에 집중되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경제성장은 소득불평등을 완화시킬 수 있다. 경제성장으로 일자리가 늘어나고 임금이 높아지면 실업자도 줄고 국민들의 소득도 전반적으로 높아져서 중산층이 증가한다. 경제성장으로 더 많은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되면 저소득층에 대한 재분배정책이나 복지정책도 확대할 수 있다. 따라서 경제성장 없는 소득불평등 완화는 불가능하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사실 성장과 분배를 기계적으로 분리하여 사고하는 것도 적절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국 경제가 저성장에 직면하고 있고 세계 경제 침체도 지속되면서 성장과 분배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은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의 불평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소득재분배 자체보다 기회의 균등과 공정한 경쟁이 가능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서민들을 서럽게 만드는 것은 돈이 없는 것보다 능력과 실력이 있어도 부모의 권력과 재산이 없으면 정당한 경쟁조차 할 수 없는, 힘없는 사람은 경쟁의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이제 한국사회는 ‘개천의 용’도 불가능하고 어떤 부모를 만나는가에 따라 인생의 출발선이 다른 사회가 되었다. 언론에서 연일 보도되고 있는 대통령 측근들의 행태를 보면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인지에 대한 의구심도 커진다. 좋은 직장의 인턴 자리를 하나 얻기 위해서도 좋은 부모를 만나거나 권력에 줄을 서야 하는 현실은 열심히 살아가는 소시민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준다.

정치인들은 성장과 분배의 거대한 담론들과 인기를 끌기 위한 실현 불가능한 공약을 내걸기보다 먼저 자신들의 특권을 내려놓고 기회 균등과 공정한 경쟁을 위한 사회개혁에 앞장서야 한다. 표를 쫓아다니는 정치꾼만 있고 국가와 국민의 미래를 걱정하는 진짜 정치인이 없고 ‘비정상의 정상화’를 외쳤던 대통령이 가장 ‘비정상’적인 국가에서 어쩔 수 없이 살아가야 하는 국민들에게는 씁쓸함만 깊어가는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