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가 치유자가 될 수 있다
심리기획자 이명수·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부부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주는 나라’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나라’
우리나라를 수식하는 말들이다. 분명 50여 년 전보다 잘 살고, 풍족해졌다. 첨단산업이 발달했고 생활 수준도 높아졌다. 그러나 행복하지가 않다. 개미 지옥처럼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답답한 가슴만 때린다. 왜 답답한지, 왜 마음이 아픈지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심리기획자 이명수·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부부는 “손이 베면 빨간약을 바르고 밴드를 붙인다. 그와 마찬가지로 심리적인 상처가 생겼을 때 마음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내 상태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두 사람은 10여 년 동안 재난 현장, 트라우마 현장을 다니며 국가폭력 피해자, 쌍용자동차 해고자, 세월호 유가족들과 함께하며 그들에게 치유의 시간과 공간을 선사했다. 탄탄한 현장 경험을 쌓은 이들이 아파도 아픈지 모르는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처방전을 제시한다.
OECD 행복지수 최하위, 헬조선 등이 우리나라의 심리상태를 보여 준다. 작금의 상황을 어떻게 진단하는가
이명수(이하 이): OECD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자살률 최상위권인 반면 타인 혹은 공적 기관에 대한 신뢰도는 최하위다(2016 년 10월 기준). 타인에 대한 신뢰도는 26% 수준으로 OECD 평균보다 10% 가까이 낮다. 타인에 대한 신뢰도가 가장 높은 덴마크는 75% 수준이다. 정부 신뢰도 역시 마찬가지다. OECD 평균이 0.46인데 비해 한국은 0.28이다. 33개국 중 29위에 해당한다. 정부가 어떤 발표를 해도 국민들이 전적으로 믿지 않는다. 일상생활에서도 그 모습은 드러 난다. 낯선 사람이 짐을 들어주겠다고 해도 믿지 못한다. 머릿속에 ‘훔쳐 가려고 하나, 이 사람이 왜 이러지’ 등의 생각을 떠올린다. 우리는 많은 에너지를 이렇게 소모하며 살고 있다.
이것은 사람을 함부로 하는 사회 분위기로 이어진다. 몇 년 전 대기업 오너 자녀가 승무원들을 무릎 꿇린 일이 있었다. 일명 ‘땅콩 회항’ 사건이다. 참 많이 분노했다. 왜 사람의 무릎을 꿇리는 것인가? 승무원들은 왜 무릎을 꿇었을까? 많은 이들이 함부로 다뤄지는 것에 익숙하 다는 방증이다. 직장, 군대, 학교에서의 폭력을 그냥 지나친다. 개별적 인간을 무시하고 집단에만 집중하면 그렇게 된다. 우리 사회가 지옥이 된 것은 사람을 함부로 여기고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혜신(이하 정): 자본주의는 자본을 주인으로, 인간은 도구로 만들 어갔다. 반도체 공장에서 입는 보호복은 사람이 아니라 반도체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우리는 그런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다. 사실 부당한 요구를 받았을 때는 그에 맞는 반응을 해야 한다. 고문을 하는데 상냥하게 대응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은가? 상황에 적절하게 반응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보호하지만 상대방에게도 자신을 돌아보고 정상으로갈 수 있는 성찰의 기회를 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괴물’이 되는 거다.
한 유명 식품유통회사 CS센터 직원들을 집단상담한 경험이 있다. 10 년차 직원의 이야기다. 어느 날 아이 손을 보고 펑펑 울었다고 한다. 아이가 받아쓰기를 하고 틀리면 폭발적으로 화를 냈다고 한다. 그렇게 내 감정에만 집중하다가 아이가 손에 변형이 올 정도로 안간힘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감정노동자들은 스스로를 욕받이 라고 한다.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참아야 한다. 그런데 그 감정이 엉뚱한 곳에서 터진다. 아이나 아랫사람 등 약한 고리에서 폭발하게 된다. 결국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가 되는 것이다.
세월호 유가족을 위한 치유공간‘이웃’, 쌍용자동차 해고자를 위한‘와락’등을 마련한 이유는
정: 2005년 빨갱이로 몰려서 20년 넘게 감옥에서 살아야만 했던 국가 폭력 피해자와의 만남이 계기가 됐다. 심한 고문으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진 그분과 가족들을 상담한 이후 고문 피해자, 5·18 피해자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게 됐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일에 깊이 빠져들어 갔다. 쌍용차 해고노동자와 그 가족을 위한 심리치유센터 ‘와락’과 세월호 유가족을 위한 치유공간 ‘이웃’을 마련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였다.
세월호 직후 팽목항에 갔었다. 바다에서 건져 올린 아이들을 숱하게 만났다. 잊혀질 수 없는 경험이었다. 정신과 의사로서 트라우마 현장 경험이 많으니 뭐라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야 살수 있을 것 같았다. 일상이 무너진 이들에게는 공기 자체가 치유적인 그런 공간이 필요했다. 그 공간에 오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돌아볼 수 있고 치유할 수 있는 공간, 그런 공간을 마련하고 싶었다. 그게 민간 주도의 세월호 유가족 심리치유센터 ‘치유공간 이웃’이다.
이: 각자 사회적으로 하는 일이 따로 있는데 왜 재난 현장에 가느 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다. 물리적, 심리적으로 갈 수밖에 없는 일, 그 무엇도 상관없이 마음이 끌리는 일이 있다. 거기에 가서 힘을 보태다 보니 내 장점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기존 기득권의 포기 혹은 희생이라는 프레임은 잘못됐다. 좋아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포기나 희생이 아니다. 그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다.
팽목항에 다녀와서 혜신이 악몽을 많이 꿨다. 세월호 피해 학생들이 자신들의 부모님을 부탁했다고 한다. 경기도 양평에 살고 있는데 2주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한 후 연고도 없고 가본 적도 없는 경기도 안산으로 갔다. 몸은 당연히 힘들었다. 하지만 팔다리가 떨리고 수시로 눈물이 쏟아지는 증상은 사라 졌다. 우리는 살기 위해 평택, 안산으로 간 것이다. 12년 정도를 각종 트라우마 현장에 있었다. 트라우마 현장은 전쟁터와 다르지 않다. 타인의 아픔과 상처에 공감하는 일은 함께하는 이들에게도 상처를 준다. 일종의 ‘심리적 참전이다.
두 분의 심리적 무기는 무엇인가
이: 우리의 무기는 우리 두 사람의 ‘연인 관계’에 있다. 다른 곳을갈 때도 그랬지만 안산행을 결정할 때도 첫 번째 고려사항은 “우리 둘의 연인 관계를 이어갈 수 있나?”였다. 얼핏 한가하고 이기적인 고민처럼 보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그게 가장 본질적인 문제다. 우리 관계의 본질이 ‘연인’이라서 그렇다. 그런 본질적인 것이 훼손되지 않으리란 확신이 들지 않으면 그게 아무리 세상을 구하는 일이라 해도 뛰어들지 않는다.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다. 지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 연인 관계란 한 개별성에 집중하는 일이라고 설명하고 싶다. 연애를 할 때는, 선물을 하나 사면서도 상대방이 맘에 들어할 지 아닐지 온통 집중하지 않나. 개별적 존재로서 상대방에 대한 집중을 연애할 때는 한다. 그런데 그 이후론 그런 집중이 대개 사라진다. 하지만 그런 집중과 주목을 주고받을 수있는 관계는 삶의 꼭 필수적인 에너지원이다. 이런 에너지가 우리 일상에는 작동하기 때문에 지금 하는 일들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거라 생각한다.
이: 내가 쉰 살이 되던 생일에 혜신에게 다이아몬드 귀걸이와 이원균 시인의 ‘속도’라는 시를 선물 받았다. 만일 느티나무가백 미터 경기에 참가한다면 출발선에 가만히 서 있다가 오백년 후엔 결국 자기 푸른 그림자로 골인 지점을 덮어 버릴 것이라는 내용의 시다. 혜신은 ‘당신이 이런 속도를 가진 남자 라서 참 좋아’라고 주석을 달아줬다. 그 축하와 응원의 말이참 좋았다. 뭘 해도 초초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잘 안되고 있으면 시에서 표현된 것처럼 느티나무가 도착점을 덮고 있는 중이구나 생각한다. 내 속도에 맞춰 가다 보니 본질에 더욱 집중할 수 있다.
정: 함께 살면서 나는 이 사람이 지금 뿌리를 내리고 있는 중이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흔히 ‘속도’라고 하면 앞으로 나아 가는 것만 떠올리지만 밑으로 깊숙하게 내려가는 방향도 있다.
최근 『내 마음이 지옥일 때』를 발간했다. 두 분에게도 지옥이 있는지
정: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항상 전압차가 발생한다. 그 안에서 스트레스가 생긴다. 누구에게나 관계로 인한 스트레스가 있기 마련이다. 그럼에도 대개의 경우 우리가 비교적 편안하고 여유로운 것은 지옥에서 나오는 방법에 대한 노하우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지옥은 있지만 상대적으로 수월하게 나온다.
이: 덧붙이자. 사람이 살다 보면 넘어질 수 있다. 자동차 운전을 하면서 자의든, 타의든 사고가 한 번도 안 날 수는 없다. 다만 처리의 문제다. 지옥에서 나올 때의 핵심은 빨리 정리하고 버리는 것이다. 대가가 없는 행운은 없다. 수많은 로또 1등 당첨자 가운데 안정되게 사는 사람은 극소수다. 나머지는 가족 간의 불화, 도박 중독 등을 겪고 있다고 한다.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은 재단을 만들어서 자신의 행운을 사회와 공유한 사람들이 다. 일반적으로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말짱하게 지옥을 나오려고 한다. 돈, 관계, 명예, 권력 등을 포기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포기하지 않고 지옥에서 나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정: 이성복 시인의 시 ‘그날’에 이런 구절이 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현대인들은 아프지만 그 아픔을 자각하지 못한다. 만일 ‘이건 아닌데…….’ 하는 느낌이 든다면 이유가 있는 것이다. 주목해줘야 한다. 하지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지, 남들이 나를 얼마나 부러워하는데’ 등의 생각으로 불편함을 덮어버린다. 그때의 불편함은 건강한 불편함이다. 성찰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사회적 통념으로 개별적 성찰을 막는다. 이 두 가지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민감하게 들여다보고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면 내 상태를 자각할 수 있다. 알면 된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 『내 마음이 지옥일 때』이 책 제목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내 마음이 그런데 어떻게 알았냐?’고 말한다. 속마음을 듣는 일을 많이 하면서 알았다. 모든 사람들이 대동소이하게 불행하 다는 사실을. 지옥에 빠지지 않을 수는 없다. 여러 방법을 통해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그리고 지도가 있으면 조금은 수월하게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고, 이 책이 그길잡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두 분의 발걸음은 앞으로 어디로 향할 것인가
정: 가장 가깝게는 그동안 제작해 온 치유 다큐멘터리 ‘세월호 세대와 함께 상처를 치유하다’가 7월에 완성된다. 세월호 세대의 내상을 치유하기 위한 작품이다. 그 세대 아이들은 서로에게 치유자가 될 수 있다. 저렇게 하면 치유가 되는구나를 알리고 종국에는 우리 모두가 치유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퍼뜨리고 싶다. 그 치유 다큐를 보면 한, 두 명의 전문가로 ‘치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저절로 인식하게 될것이다.
이: 또 하나 계획하고 있는 일이 있다. 돕는 사람을 돕는 재단, 이른바 ‘돕돕재단’을 만드는 거다. 앞서 말한 것처럼 누군가의 상처를 듣고 공감하는 일은 심리적 참전이다. 그들이 힘들고 지치지 않게 지금 하는 일의 가치와 의미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게 ‘돕돕재단’의 역할이다. 쉽게 말하면 ‘엄마의 엄마’가 되어주는 거다.
쉽게 최근의 비유를 들자면 지금 문재인 대통 령은 치유자다. 5·18 유공자를 안아주고 현충일 추념사에서도 모든 사람들을 보듬어 줬다. 개별적 사람에게 집중하고 그들이 보호받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사람들에게 치유적 느낌을 준다. 이런 때 대통령에게 당신이 하는 일 덕분에 안심이 되고 희망을 갖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면 대통령은 신이 나서 더욱 열심히 치유적 행위를 강화할 것이다. 이런 경우 심리 치유적 관점에서 보면 대통령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일은 누군가를 돕고 사람을 돕고 행위다. 그것이 돕돕이다.
정: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국가에서 사람의 목숨을 살리는 적정 기술처럼 ‘적정 심리학’에 대해 몇 년 전부터 둘이서 정리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일상생활에서 꼭 필요한 심리학, 환자를 위한 심리학이 아닌 보통 사람을 위한 최적의 심리학을 체계 적으로 정리하는 작업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도처에 있다.
상처가 심해서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다. 심리적 응급조치만 가능해도 사람 목숨을 건질 수 있다. 현장의 경험을 통해서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심리치유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 보고 싶다. 누구나 배울 수 있고 자기 목숨을 지킬 수 있는 그런 학문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