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을 자극하는 도시, 포르토

2018-02-02     이지연 수석기자

포르토를 배경으로 한 영화가 지난 1월 개봉했다. 배우 안톤 옐친의 유작으로 화제를 모으고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포르토’라는 지명에 마음이 설렜다. 처음 포르토에 간 것은 2010년 해외 출장 때다. 1~2월 이었는데도 따스한 햇볕이 기분 좋게 길가에 내려 앉아있었고, 갈매기들은 사람들을 아랑곳하지않고 평온하게 산책을 즐겼다. 그 장면이 너무 인상적이었던 탓에 이번 여행을 시작하면서 포르토는 꼭 가겠다고 결심했다. 기간도 스페인, 포르투갈 20일 일정의 1/4인 4박 5일간 이곳에서 머물기로 했다. 내게 포르토는 이번 여행의 시작이었고, 전부였다.

Hello, 해리포터~

이 도시를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작은 도시지만 자랑거리가 많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맥도널드 매장이 여기에 있고, 상벤투 기차역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으로 꼽힌다. 포르토 와인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그라함과 샌드맨, 테일러스 등 유명 와이너리가 자리를 잡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동 루이스 1세 다리’ 역시 포르토의 명물이다.

무엇보다 무명의 조앤 K. 롤링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 ‘해리포터’ 시리즈가 바로 여기 포르토에서 태동했다. 길을 걷다 보면 해리포터가 입었을 법한 교복을 입고 다니는 학생들을 실물로 볼 수있다. 특히 1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렐루 서점은 호그와트 마법 학교의 모티브가 되었다. 해리포터의 오랜 팬으로서 렐루 서점을 지나칠 수 없었다. 서점에 들어가려면 3유로짜리 입장권을 구매해야 한다(2018년 정보를 찾아보니 4유로 내외로 오른 모양이다). 서점 한 번구경하자는 건데 무슨 입장권이냐 싶겠지만 책을 사는 사람은 1/3에 불과하다고 하니 그들에게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래도 책을 사면 입장권 비용은 빼준다.

내부가 넓은 편은 아닌데다 항상 사람들이 많아서 표를 사고도 서점 앞에서 대기하는 시간이 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서점 앞에서 기다리다가 들어오라는 직원의 안내에 놀이동산에 가는 어린아이처럼 신났다. 내부로 발을 딛는 순간, 무대가 바뀌었다. 21세기에서 19세기로 타임머신을 탄 느낌이었다. 고풍스러운 목조 인테리어와 여러 가지 책 그리고 서점 한가운데 있던 계단까지 상상력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사실 내게 상상력이 남아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회사 시스템에 맞춰 생각의 구조가 바뀌었고, 감성보다는 이성이 앞섰다. 일기장을 접은 지 오래되었고 일거수일투족을 남겼던 싸이월드가 한물간 다음에는 감성 촉촉한 글을 쓰지 않았다(옛날 사람이라고 해도 할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상상력이라는 방의 문을 닫았었다.

그러다 여행을 하면서 멈춰있던 톱니바퀴가 서서히 작동하기 시작했다. 오죽하면 드럼세탁기 속 빨랫감을 보면서 우주를 떠올렸을까. 둥근 창문이 지구 같았고, 그 속의 빨랫감이 인간 같았다. 내다 꽂히고 물 폭탄을 맞으면서도 버텨내는 우리네 모습 같아 보여 빨랫감에 동정심이 생기기도 했다. 더불어 어느 짓궂은 신은 나와 같은 마음으로 인간들의 삶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지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기도 했다. 그리스 신화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았나 보다.

서점에서도 상상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물론 상상력이라기보다는 미디어의 영향이라고 설명하는 게 더 적합하겠지만 해리와 론, 내가 애정하는 캐릭터 헤르미온느가 그리핀도르 기숙사로 배정받고 올라가던 모습이 떠올랐다.

액자속 그림들은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신입생, 그중에서도 이름을 부를수 없는 그 사람을 물리친 해리의 존재에 호기심을 드러냈고, 계단은 이리저리 움직이면서 길을 만들어냈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이 개봉한 지가 조금 있으면 20년이니 그런 CG는 당시에 굉장히 참신하게 다가왔다. 그 장면을 떠올리며 서점의 계단이 내가 가야 할 곳으로 데려다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서점에는 나와 같이 해리포터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곳곳에 여러 버전의 해리포터 책이 있었고 또 상상 속 괴물의 피규어(?)도 있었다.

하지만 서점은 계단이 전부가 아니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서점이 갖고 있는 이야기도 풍부했다. 어느 방송에서 본 것으로 기억되는데, 서점이 잘 되자 직원들이 자신의 돈을 책장 밑에 붙이면서 자신도 이곳 처럼 성공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원했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고사를 지내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2층에서만 볼 수 있는 광경도 빼놓을 수 없다. 높다란 책장 위는 옛날 책들이 꽂혀있었다. 바로 밑에새 책들과 어찌나 대조를 이루던지 그걸 보는 느낌이 묘했다.

그 좁은 공간에서 한참을 머물렀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셔터 누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람들이 워낙 많아서 사진 찍는 일도 수월하지 않았다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한 장의 좋은 사진을 위해서는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했다. 그렇게 공들여서 사진을 남기고, 둘러본 곳도 없었던 것 같다. 서점을 나오면서 책 한 권을 샀다. 해리포터 시리즈와 다른 책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표지가 예쁜 쪽을 선택했다. 지금 까지도 그 책을 애지중지하면서 고이 책장에 모셔두고 있다. 여행 때의 감정을 추억하고 싶을 때만 꺼내보는 것은 나만 아는 비밀로 남겨 두고 싶다.

외국인들과 친구되기

포르토는 예술적인 도시다. 골목마다 벽에 그림이 없는 곳이 없다. 어느 성당의 벽면은 그림이 그려진 타일로 채워져 있기도 하다. 상벤투 기차역에도 포르투갈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묘사한 커다란 벽화가 약 2만 개의 아줄레주(Azulejo) 타일로 장식되어 있다. 내 숙소였던 ‘포르토 갤러리 호스텔’은 미술관이나 예술인들이 모여 있는 지역 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호스텔 역시 동네 분위기와 비슷했다. 들어가는 입구부터 바닥을 투명하게 만들어서 밑에 작품을 전시해뒀다.

복도에도 몇몇 작품들이 걸려있었다. 거실에 모여 있는 호스텔 사람 들마저 예술가처럼 보였다. 그동안은 대부분 짧게 짧게 머물렀던 탓에 호스텔에 마련되어 있는 워킹 투어에 참가할 여유가 없었다. 혼자서 돌아다니고 싶은 욕심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보름 정도 지나니까 사람들이 그리워졌다. 중간, 중간에 동행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외국인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다.

포르토에서는 다른 곳에 비해 오래 머물기도 하고 호스텔 분위기도 마음에 들어 워킹 투어를 신청했다. 오전 10시에 호스텔 현관문 앞에서 사람들과 만났다. 포르토에 와 있다는 점 외에는 공통점 하나 없는 우리는 어색하게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리스본에서 살다가 포르토에 와서 살고 있다는 호스텔 스태프가 우리를 이끌었다.

예쁜 조각품들이 있는 공원을 비롯해서 혼자였다면 결코 가지 않았을 구석진 곳까지 돌아다녔다. 포르토 전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뷰포인트였다. 그곳에서 갈매기 한 마리를 봤다. 꽤 늠름해 보이는 기러기는 역시나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진을 찍으려고 다가가도 날아가지 않고, 사람들 무리로 거리낌없이 성큼성큼 다가가는 모습이 오히려 친해지고 싶은 듯 보였다. 덕분에 포르토와 갈매기를 한프레임에 담을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는 만족했다.

호스텔 스태프의 설명을 들으면서 포르토가 더욱 사랑스러워졌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더니 맞는 말이었다. 더 친근하게 느껴졌고, 가깝게 생각되었다. 약 2시간의 투어를 하면서 몇몇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며 친해졌다. 한 친구는 일본인이었는데, 다니던 광고회사를 그만 두고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왔다가 잠깐 여행 중이라고 했다. 또 다른 친구는 프랑스에서 온 친구였다. 곱슬머리가 귀여웠던 그 친구는 프랑스 출신답게 감정이 풍부했다. 투어가 끝나고 나서 도우강 인근 노천카페에 앉아 우리 셋이서 맥주를 마셨다. 외국인 친구들과 이렇게 대화를 나눈 것은 여행하면서 거의 처음이었던 것 같다.

유럽에 한국 여행객들이 많아서 어렵지 않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은연중에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생각한 것을 영어로 말하는 게 왜그렇게 어렵던지. 대화 내용을 이해하고, 할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해서 말을 하려고 하면 벌써 주제가 바뀌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친구들 과의 대화가 토익 LC 테스트 같았다.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 돌아와서 바로 영어 학원에 등록했다. 머리에만 있는 영어가 아니라 입이 트이는 영어를 하고 싶었다. 외국인들과 자유롭게 소통을 하고 싶었다.

아쉬운 것이 여행할 당시만해도 시험을 위한 영어공부만 열심히 했지 회화는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각나는 대로 떠들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뜻이 제대로 전달이 되었는지 잘 모르겠다. 말은 잘 못했어도 인지상정인 것인지 일본인 친구와는 잘 통했다. 그녀와는 페이스북 친구를 맺고 요즘도 종종 연락을 주고받곤 한다.

저녁에는 호스텔에서 마련한 포르토 집밥을 먹었다. 여기에서도 이스라엘에서 온 학생, 이탈리아 출신으로 리스본에서 일하는 프로그래머 등등을 만났다. 이스라엘 친구는 이제 갓 25살이 된 여자친구였는데, 군대 다녀온 이야기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솔직히 아침부터 저녁까지 영어 듣기, 말하기 테스트를 했더니 밥이 잘 먹히지 않았다. 밥을 먹으면서도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집중해야 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알 수 없는 데다가 헛배까지 불렀다.

역시 한국말이 편하다

식사 후에 와인 한 잔 더 하자는 그들의 제안을 거절했다. 편하게 있고 싶었다. 마침 바르셀로나와 리스본에서 동행 친구가 포르토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녀의 숙소도 마침 내가 묵고 있는 갤러리 호스텔이었다.

그녀를 상벤투역으로 마중나갔다 돌아오는 길에 와인 한 병을 사가 지고 왔다. 처음 바르셀로나에서 만났을 때부터 맥주를 마시던 사이라서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마련되었다. 안주로는 그녀가 리스본 벨렘지구의 파스테이스 드 벨렘에서 사 온 에그타르트와 구운 밤을 먹었다. 술은 이야기를 부르고, 이야기는 술을 부르고. 한 병을 금방 다 마셨다. 영어로 대화하느라고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저녁 대신 에그타르트를 배부르게 먹었다. 그녀는 울산에서 친동생과 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이전에 직장생활을 하기도 했지만 자신만의 인생을 살기로 결정하고 사업을 시작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여행은 포기할 수 없어서 일 년에 몇 차례 해외로 떠난다고 말했다. 이번에도 크로아티아를 거쳐서 스페인, 포르투갈을 여행하고 있는 중이었다. 자유롭게 여행하는 그녀의 모습이 좋아 보였다. 영어를 잘하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했다. 자신의 여행 목적은 ‘쉬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녀의 확실한 생각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생각해 봤다. ‘나는 어떤 여행을 원하는 걸까?’ 아직 확실한 나만의 여행 주관이 없었다. 그걸 알려고 떠나온 여행이었으니, 한국에 돌아가기 전에는 한 번 찾아보자며 스스로에게 미션을 주었다.


<‘이 기자의 무모한 여행기’는 다음 달에도 계속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