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우형, “겸손하게 그러나 철저하게”

마틸다 ‘미스 트런치불’로 돌아온 뮤지컬 배우, 김우형

2018-10-01     김소정 선임기자

2005년 뮤지컬 데뷔부터 주인공을 꿰차더니, <지킬 앤 하이드>로 2007년 더뮤지컬어워즈 남우신인상을 받았다. <올슉업>, <미스 사이공>, <아이다>, <조로>, <신과 함께> 등 오디션에 떴다 하면 재차 삼차 모셔가기 바쁜 배우, 김우형은 무대에서 보낸 13년 동안 속된 말로 ‘미친 존재감’을 뿜어내며 안팎으로 신뢰를 쌓아왔다. 그런 그에게 2018년 뮤지컬 <마틸다>는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으라는 숙제를 던진 작품이다. 전무후무 악랄 캐릭터 ‘미스 트런치불’을 어떻게 관객들에게 각인시킬까? 9월 초연 이후 6개월의 대장정에 들어선 그는 매회 최고의 공연, 완벽한 트런치불을 연기하기 위해 악바리 근성을 어김없이 쏟아내고 있다. 목소리와 연기에 처음 반하고, 잘생긴 외모에 두 번 반하고, 겸손한 자신감에 세 번 반한다는 뮤지컬 배우 김우형을 만났다.

무대를 약으로 쓸 줄 아는, 천상 배우

2005년 <지킬 앤 하이드> 오디션 주인공 합격, 그러나 데뷔는 <그 리스>의 ‘대니’였다. 같은 주연자리라도 캐릭터가 주는 무게감과 비중에 비췄을 때, 살짝 아쉬운 선택이지 않았나 싶은데.

“두 작품 모두 같은 제작사였다. 지킬 앤 하이드로 첫 무대에 오르 기에는 경험이 전무했기 때문에 시험대 삼아 나를 그리스 무대에 먼저 올린 거다. 김우형이란 배우가 ‘지킬’이라는 큰 인물로서 극을 이끌어갈 수 있을지에 대한 사전 평가랄까. 아쉽다기 보다 당시 내 나이에 어울리는 역할을 맡아서 행운이었다.”

신인 때부터 주인공으로 활약하며 속된 말로 잘나갔지만 5년차, 나이 서른에는 많이 힘들었다고 했다. 그런 김우형을 성장시킨 작품은 <지킬 앤 하이드>와 <아이다>였다.

“두 작품은 내게 그야말로 꿈의 무대였다. 이른 시기에 모두 주연을 맡아서 마냥 즐겁게 임했던 것 같다. 그런데 배우 5년차 정도 되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내가 어느 정도 수준으로 연기를 하고 무대를 채우는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던 거다. 대중에게 잘 보이고픈 욕심은 커지는데 반해, 연기는 제자리걸음에 그치는 것 같아 좌절했다. 그 시절 아이다의 ‘라다메스’는 슬럼프의 정점이었다. 너무 다행스럽게도 세 번째 ‘지킬’을 만났을 때 무대 위에서 슬럼프를 극복했다. 내게 꿈 같았던 두 무대를 통해 성장통을 겪고 또 치유 받았다.”

어린 시절, 드라마 모래시계를 통해 배우가 되겠다 다짐했다는 그는 10년이 넘는 무대 경험과 검증된 실력을 바탕으로 2017년 뮤지컬 <모래시계>에서 드디어 ‘태수’를 만났다. 원작의 방대한 스토리와 개성 강한 인물들을 잘 살린 공연이자, 김우형에게는 맞춤옷 같은 작품이었다. 얼마나 감격스러웠을까.

“작년, 모래시계 ‘태수’는 작품과 역할이 내게 주는 상징성이 커서 애착이 남다르다. 드라마가 방영됐던 1995년에 대한 강렬한 향수와 캐릭터가 남긴 여운은 배우로 살아가도록 중심을 잡아주었다.”

뭐 하나 특출한 것 없이 그저 운이 좋아서 배우가 되었고,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악바리처럼 최선을 다할 뿐이라고 겸손하게 말하는 그이지만, 누가 봐도 천상 배우다.

공연의 완성도, 작품의 생명력에 마음 쓰는 13년차 베테랑

경력도 쌓였고, 알아주는 사람도 많고, 이쯤 되면 원하는 작품만 쏙쏙 골라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출연작을 고르는 본인만의 기준이 따로 있을까.

“저마다의 이야기와 개성을 지닌 작품들이지만 공통적으로 좋은 작품은 모든 배우들이 알아본다. 하지만 연기를 잘한다는 이유로, 인기와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하고 싶다는 바람만으로 배역을 맡으면 극의 완성도가 떨어진다. 배우가 가진 재능, 색깔, 조건 등이 캐릭터와 얼마만큼 잘 맞아떨어지는지 또는 얼마만큼 창의적으로 인물을 해석하고 표현해낼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 따라서 출연작을 선택하는 기본은 ‘내가 작품에 잘 녹아날 수 있나, 작품에 제대로 기여할 수 있나’로 판단한다.”

김우형이 더없이 빛을 발한 작품들은 어김없이 재연 섭외가 들어오지만, 욕심을 내기 시작하는 순간 과감하게 내려놓는다. 하고 싶지만, 할 수 있지만, 다른 재능을 지닌 후배들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것도 연차가 쌓이면서 생긴 미덕이다.

“개인적인 욕심과 명예, 부를 쫓다 보면 빗나간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 피해는 배우 본인뿐만 아니라 작품의 생명력에도 영향을 끼친다. 좋은 작품이 좋은 배우들로 하여금 오래 이어지려면 시기 적절한 바통 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배우는 나이를 먹지만 작품만큼은 언제나 생기 넘치는 젊음을 유지해야 한다.”

경쟁은 없다, 배려와 존중이 있을 뿐

오디션 무패신화, 손에 꼽는 뮤지컬 전문 배우지만 배우들과의 경쟁과 평가에 대한 두려움이 항상 존재한다.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더니, 현답이 돌아왔다.

“경쟁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경쟁이 될 수 없다. 개개인이 지닌 능력과 조건이 다름을 두고 경쟁이라 한다면 그건 불공평하다. 배우는 본인의 신체, 목소리, 감정 등의 재료를 가지고 최선을 다할 뿐이지, 그에 맞는 역할을 맡고 사랑 받는 것은 그야말로 제작진과 관객의 선택에 달려 있다. 결국은 배려하고 사랑 하는 마음이 중요한 것 같다. 배우, 스텝과 긴밀 하게 감정을 교류하고 존중하려 노력한다. 단지 스스로 연기에 만족하지 못할 때는 조금 두렵다. 그래서 끊임없이 연습하고 준비한다.”

경쟁의식을 걷어낸 대신, 함께 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통해 더 좋은 공연을 만들어 간다고 했다. 더블 또는 트리블 캐스팅이 일반 적인 요즘, 같은 역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장점을 칭찬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그는 지녔다.

괴상망측, 악랄, 비호감 캐릭터 ‘미스 트런치불’을 만나다

아시아 최초, 국내에서 초연되는 <마틸다>는 명석한 소녀가 현실의 부당함에 맞서 자아와 행복을 찾아가는 과정을 그린 판타지 뮤지컬 이다. 주인공보다 더 큰 관심을 받는 인물 ‘미스 트런치불’을 김우형이 연기한다. 리얼한 분장, 너무 못생겨서 당황했다는 후기와 함께 캐릭터에 대한 각양각색 반응이 가히 폭발적이다.

“세상에 없던, 앞으로도 없을 강력한 인물이다. 지독한 원칙주의자에 아이들을 증오하는 재수 없고 악랄한 여자 교장. 물론, 아이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잔인함이 있지만 무대에서는 위트 있게 풀어냈다. 그녀의 과격하고 괴상망측한 행동은 우스꽝스럽지만, 미스 트런치불은 코믹한 캐릭터가 아니다. 진지하기 때문에 웃음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거다. 지나칠 만큼의 진지함, 내면의 여성성을 디테일하게 표현하는 것이 포인트다.”

리듬체조, 뜀틀, 던지기 등 몸을 굉장히 잘 써야 하기에 강도 높은 훈련은 필수, 더불어 특수의상까지 입어야 하니 긴 시간 버텨내는 체력도 필요하다. 완성하는 과정이 고됐던 만큼, ‘미스 트런치불’이 김우형의 또 하나의 완소 캐릭터가 될 것 같다.

어른들에게 주는 선물 같은 작품, 뮤지컬 ‘마틸다’

“마틸다는 어른들에게 주는 선물 같은 작품이다. 소재는 다소 흉악스럽지만 판타지 요소들이 섞여 남녀노소 불문하고 즐거움과 교훈을 준다. 특히 아이들이 무대 위에서 치열하게 연기하고 열정을 불태우는 모습은 뭉클하기까지 하다. 아이들의 순수함과 진실함은 세상 무엇도 따라갈 수 없구나 새삼 느낀다.”

앞선 작품들과는 또 다른 인간 김우형을 보여주는 것 같다.

“나는 원래 아이를 안 좋아한다. 헌데 아닐지도 모르겠다. 작품을 하면서 아들 생각을 많이 했다. 아역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을 보고 아빠미소를 짓는 나를 발견하고서 어이가 없고 재미있기도 했다.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하면서 계속 성장한다고 할까. 적절한 시기에 마틸다를 만나 너무 다행이다. 내 아이와 주변의 새로운 것들을 더 사랑하게 되는 경험, 다른 어른들도 마틸다를 통해 꼭 느껴보길 바란다.”

‘겸손하게, 철저하게, 꾸준하게’ 성장하는 배우 될 것

인기와 흥행을 위한 요령보다는, 잘난 것 하나 없다는 겸손함으로 지독하리만큼 철저하고 꾸준하게 매회 무대를 준비하는 배우다. 미스 트런치불과 이별한 이후의 계획과 더불어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만나게 될 날이 있을지 물었다.

“너무 막강한 캐릭터를 만난 터라 완전히 벗어내고 새로운 인물을 익히기까지는 긴 휴식이 우선 필요할 것 같다. 어떤 환경, 무슨 역할이든 다 욕심나지만 살아 움직이는 무대 위에서 연기하다가 다른 영역으로 넘어갔다 돌아왔을 때, 아마도 지금의 나를 다시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욕심부리지 않고 팬들에게 감사하면서 활동을 이어갈 생각이다. 물론 배우로서 주어지는 좋은 기회는 놓치지 않겠다.”

따뜻한 미소로 인터뷰를 마무리한 그는 신념과 가치관으로 멋이 든, 참 귀한 배우였다. 김우형을 무대 위에서 만날 수 있다는 건 관객과 팬들에게 정말이지 행운이다. 뮤지컬 히어로로 오래도록 사랑 받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