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계곡, 영실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 제주 한라산

2019-01-22     리모(김현길) 여행드로잉 작가

제주의 하늘에 거대한 겨울이 떠 있었다. 잿빛 구름을 뚫고 굵직한 눈송이들과 함께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강한 바람에 흩날리는 눈송이들. 은빛으로 변해버린 제주공항의 모습이 낯설었다.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곧 만나게 될 순백의 한라산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한라산을 만나기 위해 반드시 정상을 올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해발 600~800m의 국유림 일대를 둘러싸고 있는 전체 길이 약 80km의 한라산 둘레길을 걸어보는 것도 한라산을 즐기는 또 다른 방법 중 하나다. 여행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사려니숲길 역시 이 한라산 둘레길의 일부다.

한라산을 오르는 길 또한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다. 백록담을 보기 위해서는 제주시에서 출발하여 한라산의 북쪽 사면을 이용해 접근하는 관음사 코스와 동쪽 사면으로 오르는 성판악 코스를 이용해야 한다. 백록담을 내려다볼 수는 없지만, 고원 평야와 한라산 주봉의 절벽을 보기 위해서는 남쪽으로 진입하는 돈내코 코스와 서쪽에서 출발하는 어리목, 영실코스를 선택해야 한다. 이외에도 석굴암과 어승생악을 다녀올 수 있는 짧은 코스도 잘 정비되어 있다.

고민 끝에 한라산 윗세오름까지 오를 수 있는 영실 코스를 선택했다. 공항에 대기 중인 택시들은 눈 때문에 어리목 입구까지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선 신제주로 이동한 뒤, 240번 급행 버스를 이용했다. 240번 버스는 제주시에서 출발하여 한라산 서쪽 사면을 통과해 중문으로 향하는 코스로 운행되는데, 어리목 입구와 영실 입구를 경유하기 때문에 한라산을 오를 예정이라면 꼭 알아두어야할 노선 중 하나다.

두텁게 내린 눈으로 도로 상태가 좋지 못했던 탓일까. 영실을 오르는 동안 등산객을 거의 마주칠 수 없었다. 바람조차 잦아든 겨울 산속은 한없이 고요해 담담하게 떨어지는 눈송이가 바닥에 내려앉는 소리마저 들리는 듯 했다. 시간이 멈춰진 듯 비현실적인 풍경. 당장이라도 영실의 곳곳을 누비고 다닐 것 같던 나는 겨우 영실 입구의 풍경에 취해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한라산 영실(靈室).
한자로 풀이하면 ‘신령들의 집’, ‘신령들이 사는 공간’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단어 그 자체로도 이미 신비로움이 가득한 '영실'은 한라산 정상 백록담의 남서부에 위치한 골짜기로 한라산을 대표 하는 절경 중 한 곳이다.

영실은 그 둘레가 약 2킬로미터, 계곡 깊이가 약 350미터이며 5,000개의 기암으로 둘러싸여 있다. 4계절 모두 아름답지만 특히 겨울의 설경이 아름다워 제주도가 눈에 덮이는 계절이 되면 많은 이들이 설레는 발걸음으로 이곳을 찾는다.

성판악 코스에 비해 길이는 짧지만, 볼거리가 많아 걷는 내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신비롭게 맺힌 구상나무 가지의 상고대 사이를 걷다 보면 어느새 나타난 영실 오백기암과 병풍바위의 장쾌한 풍경이 저절로 탄성을 지르게 했다.

목적지인 윗세오름 대피소에 가까워지자, 눈으로 뒤덮인 너른 고원 지대가 나타났다. 해발 1600m 이상의 고지대에 펼쳐진 하얀 지평선이 경이롭게 느껴졌다. 인적이 느껴지지 않는 이곳은 산 아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새하얀 들판과 대비되는 깊고 푸른 겨울의 하늘.
그리고 그 사이에 웅장하게 솟아있는 한라산의 주봉.
나는 신들의 집, 영실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