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 내는 일본의 임금 인상 전략
일본의 저물가와 낮은 임금 수준
세계의 물가 수준을 비교할 때 쓰이는 맥도날드 빅맥 가격만 보면 일본의 물가는 두드러지게 낮다. 1990년 일본에서 370엔이던 빅맥 가격은 현재 390엔이다. 30년 동안 거의 오르지 않았다. 반면 같은 기간 미국의 빅맥 가격은 2.2달러에서 5.7달러로, 중국은 8.5위안에서 22.4위안으로 각각 뛰었다. 일본의 보도에 따르면 도쿄 직장인의 평균 점심값은 649엔(약 6,700원)이다. 뉴욕의 평균 15달러(약 1만7,700원), 상하이 평균 60위안(약 1만1,000원)에 비해 크게 낮은 수준이다.
세계 3위 경제대국 일본이 부쩍 가난해졌다. OECD에 따르면 일본의 급여 수준은 1997년을 100으로 봤을 때 작년 말 90.3으로 떨어졌다. 한국은 158, 미국과 영국은 각각 122와 130이었다. 한국인의 급여가 23년 동안 58% 늘어날 때 일본은 반대로 10% 감소한 것이다.
실질 월급이 줄어들자 일본이 자랑하는 식도락 문화도 움츠러들고 있다. 참치를 최고 횟감으로 치는 일본인은 세계에서 잡히는 참치의 25%를 소비한다. 하지만 최근 최고급 참치는 대부분 중국과 동남아시아 국가로 향한다. 일본 수산업체들이 최고급 참치 경매에서 번번이 패해서다. 30년째 소득 수준이 제자리다 보니 외식업체들은 손님이 떨어져나갈 것을 우려해 가격을 올리지 못한다. 대신 도매업체에는 매입 가격을 한 푼이라도 더 깎으려고 든다. 공급 가격은 뛰는데 매입 가격을 올릴 수 없으니 경매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게 일본 식품업체들의 하소연이다.
이와 함께 대게 값은 10년 새 2.5배 올라 대다수 일본인에게는 그림의 떡이 됐다. 결국 최상급 참치와 대게는 소득 수준이 높아져서 고속도 내는 일본의 임금 인상 전략가 식재료가 인기인 중국과 동남아로 팔려나간다. 일본인들에게 오는 것은 가격이 저렴한 만큼 질도 떨어지는 식재료들이다.
낮은 임금이 가져온 일본 경제의 악순환
월급이 안 오르니 일본인들은 1엔이라도 싼 제품을 찾는다. 기업은 1엔이라도 판매 가격을 낮추는 데 사활을 건다. 1엔에 목숨을 거는 일본 소비시장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100엔숍의 성장이다. 100엔숍은 현재 일본에서 오프라인 시장 가운데 유일하게 성장하는 분야다. 성장 정체를 벗어나려는 대형 유통회사까지 100엔숍에 새로 뛰어들고 있다.
일본 물가가 30년 동안 오르지 않는 사이 다른 나라의 물가는 꾸준히 오른 결과 일본의 상대적 빈곤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일본을 찾는 외국인들은 “살인적인 일본 물가는 옛말”이라고 입을 모은다.
오르지 않는 물가는 국가 경쟁력까지 갉아먹고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업계에선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일본 작품이 더 이상 나오기 어렵다는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애니메이션 인재들이 중국으로 빠져나가고 있어서다. 일본애니메이터·연출협회에 따르면 일본 애니메이터의 54.7%가 1년에 400만엔도 못 번다. 민간기업 평균인 436만엔을 크게 밑돈다. 협회에 가입하지 않은 중소·영세 제작사 소속 애니메이터의 처우는 훨씬 열악하다. 이를 틈 타 중국의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월급을 50만엔 이상 제시하며 일본 애니메이터를 빼가고 있다. 중국 텐센트 계열사가 출자한 일본 현지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인력은 3년 새 세 배 늘었다.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비는 미국과 중국 동영상 스트리밍 대기업의 70% 수준까지 낮아졌다.
이익이 늘어나지 않으니 임금을 못 올리고, 임금이 안 오르니 소비도 늘지 않는 악순환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일본 재무성에 따르면 일본의 개인소비는 2000년 이후 20년 동안 58조엔 줄었다. GDP의 10%를 넘는 규모다.
임금 상승 압박 거세지는 글로벌 기업들
계속되는 물가 상승과 구인난으로 고심하는 독일이 최저임금을 대폭 올린다. 프랑스·스페인을 비롯해 동유럽도 이미 최저임금을 높인 가운데 유럽을 대표하는 경제 대국 독일이 소비 여력 확대를 위해 임금 인상 카드를 빼든 것이다. 특히 낮은 임금 인상으로 악명 높은 일본도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이례적으로 기업에 직접 임금 인상을 압박하고 있다. 코로나19 재확산에 따른 경기 침체 우려, 공급망과 맞물린 인플레이션 등에 맞서 각국이 임금 인상 대열에 합류하면서 임금 인상발 인플레이션 우려가 전 세계적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현재 9.6유로(약 1만 2,860원)인 독일의 최저시급은 12유로(약 1만 6,080원)로 인상된다. 독일은 이미 2022년 7월부터 최저임금을 10.45유로로 인상할 예정이었는데 이번에 인상 폭을 더 높인 것이다. 다만 12유로로 인상되는 시점은 명시되지 않았다.
유럽에서는 프랑스가 임금 인상의 스타트를 끊었다. 최저임금을 기존보다 2.2% 올린 것이다. 이어 스페인이 1.6% 인상했으며 영국은 내년 4월부터 23세 이상에 대한 최저시급을 6.6% 올린다.
일본도 임금 인상 대열에 합류한다. 기시다 총리는 내년 춘투에서 경제계에 임금 인상을 촉구하는 문제를 검토 중이며 정부가 3% 인상을 목표로 해야 한다고 기업들을 압박하고 있다. 분배를 강조해온 기시다 총리는 최근 일본경제단체연합회 회장과 만난 자리에서도 연합회가 임금 인상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처럼 각국이 임금 인상에 나서는 것은 인력난 때문이다. 기업들은 생산량을 늘리며 코로나19 팬데믹에 따른 타격을 회복하려 하지만 계속되는 코로나19 확산세는 직원들의 직장 복귀를 가로막고 있다. 특히 숙련된 이민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독일 등은 코로나19로 이민 등이 줄면서 더욱 심각한 노동력 부족을 호소하고 있다.
문제는 이런 움직임이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인플레이션을 더욱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간 동요하지 않던 일본의 물가마저 흔들리고 있다. 일본 은행계도 "일본의 소비자물가가 영원히 '제로' 부근에서 머물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며 상승 압력이 커질 것으로 전망했다.
일본의 인력 확보 경쟁과 임금 인상 전략
1) 일본 자동차 업계의 임금 인상 바람
일본 경제가 코로나19 충격에서 빠르게 회복하면서 제조업과 물류업, 외식업을 중심으로 인력확보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경기가 정상궤도에 오르기 전에 일찌감치 인력을 확보해두려는 기업들의 경쟁이 뜨거워지면서 입사만 해도 400만원이 넘는 현금을 주는 회사까지 나왔다.
도요타자동차는 9월 말 기준 2,200명인 기간제 근로자를 2,600~2,800명까지 늘리기로 했다. 코로나19가 확산하기 이전과 같은 수준이다. 직원을 구하기 어려운 심야시간대 기간제 근로자에게는 입사할 때 주는 일시금을 20만엔(약 206만원)으로 두 배 올렸다. 또 다른 자동차 업체인 스바루도 입사 지원금을 40만엔으로 두 배 인상했다. 기간제 근로자를 350명 늘리기로 한 마쓰다는 일당을 8,770엔으로 9% 올렸다.
일본 자동차업계가 인력 확보 경쟁에 나선 것은 연말을 한 달여 앞두고 올해 생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생산을 급격히 늘리고 있어서다. 반도체와 부품 부족으로 일본 8대 자동차 업체의 생산량은 당초 목표보다 287만6,000대 줄어들 것으로 예상된다.
기간제 근로자는 기업이 3~6개월간 기간을 정해두고 직접 고용하는 계약사원이다. 자동차 등 제조업체들이 성수기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주로 채용한다. 일본 자동차 공장 근로자의 10%가량이 기간제 근로자로 추산된다. 도요타와 혼다 등 일본 기업들은 코로나19가 확산한 지난해 초 기간제 근로자 채용을 일시 중단한 바 있다. 생산 인력 확보는 대부분의 제조업계에서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인력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10월 제조업계의 평균 시급은 1,336엔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6% 뛰었다.
2) 일본 물류업계의 임금 인상 트렌드
또한 물류업계도 파격적인 조건을 내걸고 현장 인력을 모집하고 있다. 아마존 재팬은 계약직 사원의 시급을 1,200엔으로 인상했다. 수도권 물류작업 근로자의 평균 시급을 크게 웃도는 수준이다. 지바현에서 물류시설을 개발하는 일본GLP는 이 지역의 주부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보육소까지 설치했다.
3) 서비스업종의 임금 인상 바람
외출과 회식이 빠른 속도로 회복하면서 외식업계의 아르바이트 직원 확보 경쟁도 달아오르고 있다. 이자카야 체인 요로노타키는 이달부터 도쿄 신주쿠와 이케부쿠로 직영점의 아르바이트 시급을 1,200엔으로 4~8% 올렸다. 보도에 따르면 10월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3대 도시권의 아르바이트 평균 시급은 1,103엔으로 작년보다 15엔 올랐다. 2006년 조사를 시작한 이후 최고치다. 코로나19 여파로 9월 기준 일본 외식업계 종사자는 207만 명으로 2019년 9월보다 55만 명 줄었다. 비정규직 근로자도 2,059만 명으로 140만 명 감소했다. 이러한 현상으로 제조·물류업계와 외식업계의 인력 확보 경쟁이 비정규직 고용 확대와 처우 개선으로 이어져 경기 회복 속도를 높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4) 정규직의 임금 인상 압박
정규직 임금도 큰 폭으로 상승할 전망이다. 기시다 총리는 재계에 올해 임금을 3% 이상 올려 달라고 요청하기로 했다. 정규직의 급여를 올려 자신의 간판 정책인 ‘성장과 분배가 선순환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를 실현한다는 구상이다. 정부가 노조의 임금 협상을 전면 지원하는 ‘관제 춘투’를 이어가겠다는 의도이기도 하다. 관제 춘투는 아베 신조 전 총리 정부가 2014년 시작했다. 2018년에는 ‘임금 인상률 3%’라는 구체적인 수치도 내걸었다. 그 결과 아베 총리 집권 기간인 2014~2020년 대기업의 평균 임금 인상률은 2.18%로 7년 연속 2%대를 기록했다. 코로나19로 경기가 얼어붙은 올해 인상률은 1.86%로 2013년 이후 처음 2%를 밑돌았다.
우리 기업에 주는 시사점과 향후 과제
한국에서 근속 30년 이상 근로자의 임금이 근속 1년 미만 근로자보다 3배 가까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일본, 유럽 등에 비해 큰 격차다. 연공서열식 임금 인사 체계로 장기 근속자들의 연봉이 높다 보니 기업 경쟁력과 고용 안정 모두를 저해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국경영자총협회가 한국, 일본, EU 15개 회원국 및 영국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해 기준 10인 이상 사업체의 근속 30년 이상 근로자 월평균 임금이 8,089달러(약 950만 원)였다. 이는 일본(5,433달러), EU·영국 평균 임금(5,543달러)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근속 1년 미만 근로자와 비교하면 격차가 크다. 한국은 30년 이상 근속자의 임금이 1년 미만(2,744달러)의 2.95배에 달한 반면에 일본은 2.27배, EU·영국은 1.65배였다. 근속 기간이 길어질수록 한국이 경쟁국에 비해 임금이 월등하게 상승한 것이다.
이것은 유럽 국가들의 임금은 근속연수에 따라 완만하게 상승하는 반면에 한국은 가파르게 오르고 일본은 한국과 유럽의 중간 수준이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장기 근속자들의 임금이 이처럼 가파르게 오르는 이유는 연공형 임금체계가 원인이 되고 있다. 공장 생산직이 많은 현대자동차의 경우 생산직에 대해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증가하는 호봉제를 여전히 채택하고 있으며 이들 상당수는 1990년대에 입사해 근속연수가 20∼30년에 이르고 있다. 매년 임금협상으로 정해지는 기본급 인상률을 적용받아 자동적으로 임금이 오르기 때문이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근로자 100인 이상 기업의 호봉급 운영 비율은 2010년 76.2%에서 2020년 54.9%로 감소했으나 여전히 절반 이상의 기업이 호봉제를 채택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이 수행하는 일의 가치나 성과보다 근속연수에 따라 임금이 점증하는 근속 프리미엄이 있다 보니 연차가 올라갈수록 생산성과 임금의 괴리가 커지고 임금 격차도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에서는 장기근속 근로자에 대한 임금 부담이 커 신규 채용을 주저하거나 일부 관리직 이외의 장기근속자에 대한 구조조정에 나서고 있다.
경총 측은 연공서열식 임금 체계 대신 직무·성과 중심 인사 임금제도를 적극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향후 우리나라도 직무 성과 중심으로 가야 근로자에게 공정한 보상을 통한 동기를 부여해 개인 발전과 생산성 혁신을 이끌어낼 수 있으며 기업의 지속가능한 성장과 공정하고 유연한 노동시장 구축이 가능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임금 인상을 통한 성장과 경쟁력 확보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연공서열형 호봉제 임금체계로 고임금·저생산성의 고착된 우리나라는 임금체계의 변화와 개인의 직무와 역량 중심의 임금제도 개선 없이는 지속가능한 성장이 어려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