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희의 창의노트
“내가 세상에서 가장 관심 있는 사람은 누구?”
피 끓는 청춘이라면 이성 친구? 기혼자라면 아내(남편)나 자식? 지극 정성 효자로 불리는 그대에겐 부모님? 물론 모두 아닐 게다.
정답은 바로 ‘나’여서다. 내게 나보다 관심 있는 건 세상에 없다.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어디 한번 물어보자. 단체 사진 속에서 누굴 가장 먼저 찾는가? 열이면 열, 자신부터 본다. 화장실과 현관, 엘리베이터에 내걸린 거울 속에 매몰되는 것도 마찬가지.
그럼에도 참 이상한 게 하나 있다. 어쩐 일인지 소신과 생각(주장)은 그렇지 못하다. 몸은 내 것이면서도 머리는 남의 삶을 사는 이중인격 성향을 띈다. 어째서 그럴까? 인간은 자신의 주장과 결정을 드러내는데 꽤나 서툰 존재다. 충돌과 논쟁을 꺼리며 집단에 보조를 맞춰가는 유약한 존재다.
안타깝게도 집단 의사결정엔 일사불란함을 강요하는 혐오스런 망령이 숨어있다. 그 망령이 바로 동조와 동조압력이다. ‘동조(conformity)’란 개인이 집단(타인)이 가진 규범 및 가치관, 기대 등에 맞춰 행동하는 것으로, 직장과 학교, 가정은 물론 다양한 집단 내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또 ‘동조압력’이란 다수가 왼쪽을 향하고 있으면 자신도 왼쪽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무언의 압력이다. 좋든 싫든 조직 내부에 몸담고 있는 자, 동조란 굴레에서 벗어나긴 쉽지 않다. 경쟁력(생존력) 측면에선 분명 중간보단 양끝이 더 안전한데도 말이다.
동조압력을 부르는 조직 내의 전형적 대사 몇 가지를 뽑아봤다.
“도무지 의견 통일이 안 되잖아!”
“다들 하는데 혼자만 왜 그래?”
“결국 너(우리)를 위해서라고.”
그러다 동조를 끝끝내 거부하고 버틴다면, 이런 얘기가 흘러나온다.
“썩은 사과는 어느 상자에나 하나쯤 있다더니, 쯧쯔!”
이쯤 되면 소외감에다 무력감까지 몰려와 소신을 접을 수밖에 없다. 이른바 ‘존버’하다간 사표 써야 한다. 흔히 우린 동조를 ‘팀워크’란 말로 아름답게 포장한다. 어느 순간부터 다양성 존중과 개성, 남다른 사고 등은 팀워크와 가장 멀리 있는 존재가 돼버렸다. 그러는 동안 창의력 계발 운운은 별나라 얘기가 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집단 논리를 깰 수 없다는 이들에게 묻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질서정연한 우주(cosmos)가 생성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놀랍게도 이를 계산한 학자가 있다. 2020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이자 수학자인 로저 펜로즈. 그는 ‘10의 10승의 123승 분의 1(1/10^10^123)보다 작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참고로 ‘10^10^123’이란 세는 데만도 150억년 이상 걸릴 만큼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다.
여기서 간과해선 안 될 게 있다. 위는 지구상 무수한 생명체의 탄생 확률이 제외된 계산이란 사실. 때문에 우주에서 내가 지금 지구에 존재한다는 걸 확률로 따지면 1/10^10^123보다 훨씬 더·더·더 작다. 확률적으로 가능성 제로(0)인 경악할 일이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게 이 세상이다. 기적이란 말은 새털처럼 가볍다.
그런 세상의 중심은 단연 ‘나’다. 만사는 ‘나’를 축으로 공전한다. 빅뱅 이래 최고의 명품이자 유일무이한 존재가 ‘나’다. 오늘 내 모습은 우주 역사 138억 년 가운데 단 한 번뿐. 회한(悔恨) 없는 삶을 원한다면 어떻게 해야 될까? 그대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