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REPORT] 일본
정부나 기업 등 모든 조직은 역경(逆境)에 처할수록 핵심인재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역설한다. 하지만 리더가 바뀌면 똑같은 환경 아래에서도 인재전략이 크게 변하는 것이 다반사다. 일본 격언에 ‘축성(築城) 3년, 낙성(落城) 1일’이란 말이 있다. 성을 쌓는 데는 3년이란 세월이 걸리지만, 그 성을 잃는 데는 하루도 안 걸린다는 뜻이다.
기업경영도 예외가 아니다. 몇 대에 걸쳐 키워 온 회사가 하루아침에 도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도산까지는 아니어도 경영권을 상실하거나 공적자금 투입으로 회생한 기업들도 많다. 닛산, 샤프, 토시바, 일본항공 등이 그 일례일 것이다.
구미(歐美) 기업의 4배에 달하는 일본의 회사 수명
대기업의 평균수명을 보면, 구미 국가에서는 단축 경향을 보이는 반면 일본에서는 장수 내지는 연명(延命) 경향을 보인다. 포춘 지의 500대 유력기업 리스트를 보면, 1955년의 유력기업 가운데 9할이 2014년에는 리스트에서 사라지고 없다.
미국 대기업 평균수명은 1950년대 60년에서 1980년대 30년, 2014년에는 20년 이하로 크게 줄었다는 보고서가 있다. 반면, 일본의 상장기업 평균수명은 2010~2017년 사이 2배 정도 늘어나 89년으로 집계됐다. 이는 미국의 4배 이상에 달하는 일본 대기업의 생존 역량이라 하겠다.
확대 성장보다 연명의 장수기업
닛케이BP컨설팅 조사(2020년)에 의하면, 창업 100년 이상의 장수기업은 세계 전체로 7만 4,037개사이며, 이 중 3만 7,085개사가 일본 기업이다. 전체 장수기업의 절반 이상(50%)을 차지하는 셈이다. 창업 200년 이상은 일본 기업의 비중이 더욱 늘어나 65%(1,388개사)를 차지한다.
데이코쿠(帝國)데이터뱅크의 조사(2022년)에 따르면 일본의 장수기업은 처음으로 4만 개를 넘어섰다. 그러나 매출액 규모로 보면, 45%가 1억 엔 미만, 81%가 10억 엔 미만의 소규모 기업들이다. 참고로 일본 전체의 회사법인수는 177만 7천 개에 이르는데, 90.4%가 종업원 수 30명 미만이다. 1,000명 이상의 대기업은 0.23%에 불과하다.
이러한 데이터를 보면, 일본 장수기업의 대다수는 ‘지속적 확대성장’이란 본래의 경영목적 달성에는 실패했고, 가족 중심의 소규모로 연명(延命)경영에 머물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어제의 특장점이 오늘의 성장 걸림돌
일본 장수기업의 특장점으로 ‘사원을 소중히 하고, 지역사회에 공헌하며, 부단한 개선활동을 한다’를 꼽는다. 아울러 가족이나 동족(同族)에 의한 경영이 다수를 차지한다는 공통점도 보인다. 이러한 특장점들이 회사수명 연장에 도움이 됐지만, 조직의 확대성장에는 왜 직결되지 않고 있는지 그 이유를 나름대로 해석해 보면 아래와 같다.
먼저 ‘사원을 소중히 한다’는 것은 정년까지 고용을 보장한다는 의미가 크다. 하지만 이는 연공서열형 승진제도나 임금체계와 맞물릴 경우, 위험을 감수하는 도전이나 모험보다는 안전과 보신(保身) 위주로 유도한다. 부여된 정형 업무나 상사 지시에만 충실히 따르게 됨으로써 조직의 현상유지에는 유용하지만 조직의 확대성장에는 미약하다는 것이다.
둘째, ‘지역사회에 공헌한다’는 것은 전통적 상인정신으로 일컬어지는 산포요시(三方よし; 파는 사람, 사는 사람, 동네 사람 모두에게 좋은 비즈니스)의 발로(發露)로서 오늘날의 CSR과 일맥상통한다. 바람직하지만, 활동영역을 마을이나 지역사회로 한정하는 경향이 있어서 조직의 성장을 제약하는 측면이 있다. 대다수 장수기업이 국내 특정지역의 음식점, 온천여관, 소매업 등이란 점을 감안할 때, 그리고 저출산 고령화 속 총 인구 감소 추세까지 고려한다면 장수기업 대다수는 낮은 부가가치 속에 연명하거나 머지않아 수명을 다할 것으로 예상된다.
끝으로 ‘부단한 개선을 한다’는 것은 품질이나 서비스 수준을 끌어올림으로써 지역 소규모 기업의 수명 연장에는 기여할지 모른다. 다만 일본의 전체 인구가 감소하는 추세 속에서는 수명 연장도 한계에 이를 것이다. 지속적 확대성장을 위해서는 비즈니스의 글로벌화나 디지털화가 불가피할 것이다.
아울러 개선이나 개량과 같은 점진적인 혁신보다는 파괴적 혁신이 필요하지만, 대다수 장수기업들은 소규모 로컬기업으로서 우수인력이 크게 부족하며, 외부 영입에도 금전적, 비금전적 어려움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결과적으로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장수기업을 보유하고 있지만, 고부가가치 장수기업은 거의 없기 때문에 일본 경제 또한 장기 성장 정체에 빠져 있다고 할 것이다.
기업 경쟁력 약화는 국가경제 추락으로 직결
태평양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그야말로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룩해 G7 회원국으로 입성했다. 하지만 경영환경 격변에도 불구하고 ‘일본적 경영’에 집착해 온 결과, 어느 순간부터 성곽이 허물어지기 시작했고, 지난 30년간 경제성장은 정체 상태를 보이고 있다. 일본인들조차 자조적(自嘲的) 표현으로, ‘잃어버린 30년’이라고 쓸 정도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일본의 국제경쟁력(IMD 발표)은 세계 1위였다. 그러나 버블 붕괴와 더불어 10년 간격을 전후로 10위권, 20위권, 30위권으로 점점 밀려났다. 인재의 국제경쟁력을 보면, 2014년 24위에서 매년 하락해 2022년에는 63개국 중에 41위로 추락했다.
한국 또한 다를 바 없다는 것이 필자 느낌이다. 한국의 인재경쟁력은 38위지만, 일본과 비슷한 하락 경향을 보인다. 3년에 걸친 한국전쟁 후, 초토화된 한국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뤘고, G20의 앞자리에 서게 됐다.
하지만 어느새 저성장의 늪에 빠져든 실정이며, 곳곳에 경제성장을 저해하는 장벽들이 나날이 높아져간다는 느낌이다. 왠지 일본이 지나온 길을 뒤따르는 것만 같아 안타까움이 크다.
인적자본 증강이 ‘Japan as No.1 Again’ 실현의 관건
고(故) 아베(安倍) 씨는 총리 취임과 동시에 1980년대의 국제위상을 되찾고자 ‘아베노믹스’라는 경제정책을 내걸고 재임 8년 동안 끈질기게 추진했다. 후임 스가(菅) 씨와 기시다(岸田) 씨도 아베노믹스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지금 아베노믹스의 성과를 논하는 것은 시기상조이겠지만, 굳이 현시점에서 평가한다면 실패에 가깝다고 하겠다. 500조 엔에서 600조 엔으로 끌어올리겠다는 GDP 성장 목표가 10년째 요원한 실정이며, 더욱이 최근에는 감소 경향마저 보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1980년대의 위상과 영화(榮華)를 되찾기 바란다면, 인적자본의 양적 증가와 질적 강화에서 그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몇 가지 선결과제를 꼽는다면, 먼저 ‘일본적 혹은 일본식’이라는 인사제도나 고용관행, 경영방식을 과감히 벗어던지고 글로벌 스탠다드와의 융합화에 나서야 할 것이다. 여타 부문에서도 제도나 시스템의 갈라파고스화를 벗어나야 한다.
두 번째는 모든 것을 조직 내에서 해결하려는 ‘지마에(自前)주의’를 벗어나 국경을 초월한 오픈 이노베이션 등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지마에주의는 개선과 개량에 그쳐, 조그만 부가가치 창출에는 효과적이겠지만, 대박의 고부가가치 재품이나 서비스의 창출에는 오히려 걸림돌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적재적소의 인사를 하려면, 전략적 인적자원관리(SHRM)로 이행해 중장기 경영전략 실현에 불가결한 핵심인재를 글로벌 시장에서 경력사원으로 영입하는 방식도 확대해야 한다.
일본기업은 대부분이 신입사원을 채용해 OJT 중심으로 필요한 역량을 가르쳐 경영전략 실현에 대처하려고 하기 때문에 제품이나 서비스의 출시(出市)에 있어서 경쟁사보다 뒤쳐지게 되는 것이다.
지적해두고 싶은 것은 한국 또한 일본과 비슷한 경향을 보이고 각종 지표로 볼 때 일본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현실은 더욱 나쁜 실정이다. 예컨대, 경제부문의 1인당 국민소득, 비정규직 비율, 실업률, 대졸취업률, 정년연령, 회사법인과 장수기업의 숫자에서는 일본이 나은 편이고, 한국은 근로자 월평균 임금만이 일본보다 높다는 OECD 발표(2022)가 있었다. 사회부문의 출산율과 평균수명은 일본이 좋은 편이며, 고령화율에서는 한국이 낮은 편이다. 하지만 2050년경이면 고령화율에서도 한국이 일본을 앞지를 것이라는 예측이다.
이러한 미래의 국난(國難)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노사정이 합심해 인적자본 증강에 진력해야 할 것이다.
글 _ 장상수 아시아대학교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