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한 연예기획사 대표의 행동은 얄궂다. 오디션을 본 지망생에게 예고도 없이 전화를 걸어 전화를 받으면 ‘오디션 통과’, 전화를 받지 못한 지망생은 불합격 처리했다. 대표 생각에도 일리는 있다.
예고 없이 건 전화를 받는 이는 분명 운(運)이 좋은 편에 속한다. 전화를 못 받은 이는 운 좋은 편이 아니어서 데뷔도 힘들뿐더러, 설사 데뷔하더라도 인기가 없다고 한다. 진실 여부는 별개로 치열한 연예계 경험칙(Empirical Rule)이 대표에게 이런 판단을 내리도록 했다.
태초부터 인류의 삶은 예측불가 환경 그 자체였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이 지배하는 살벌한 숲에서 밤을 무사히 지내고 새 아침을 맞는 일은 오롯이 운에 달렸다. 하여 그 흔적은 지금도 남아 “밤새 잘 주무셨어요”란 인사말이 됐다. 그런 운은 21세기 문명사회에서도 부지불식간 우리 삶에 사사건건 개입한다. 온갖 변수와 요소가 얽히고설키면서 원인과 결과가 단절된 복잡계. 이를 헤쳐 나갈 유용한 도구 하나가 ‘운’은 아닐까!
“행운은 학습 가능한 사고·태도·행동의 산물이기에 원인·결과 분석이 가능하다.”
금기를 깨는 주장의 주인공은 영국 하트퍼드셔대 심리학 교수이자 행운 연구가 리처드 와이즈먼이다.
그는 운의 본질과 메커니즘을 캐고자 ‘운 좋은 사람 100명’과 ‘운 나쁜 사람 100명’(운이 좋고 나쁨은 순전히 본인의 주관적 판단)을 모아 일주일가량 합숙하며 실험과 인터뷰 등을 진행했다. “동전을 던져 나온 게 앞면인가, 뒷면인가?” “칸막이 뒤에 있는 사람이 남자인가, 여자인가?” 이런 실험들이 진행됐다.
그 결과 정답률은 예상대로 모두 반반. 운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의 결과 값엔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그러다 한 실험에서 예상치 못한 두 그룹의 확연한 차이를 발견한다.
“신문 속 사진 수는 몇 개인가?”
두 그룹에 신문을 나눠주며 이렇게 물었다. 이에 운 좋은 사람은 단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으나, 운 나쁜 사람은 평균 2분이나 걸렸다.
위 실험엔 약간의 트릭이 숨어 있었다. 신문 2면에 “세지 말라. 신문엔 43개의 사진이 있다”라고 쓰여 있었다(신문 반 페이지를 할애했고 활자 크기는 2.5cm나 됐다). 운 좋은 사람은 그 메시지를 발견했고, 운 나쁜 사람은 알아채지 못했다.
“은행에 들렸다가 무장 강도가 쏜 총에 어깨를 맞았다. 다행히 가벼운 상처를 입고 도망칠 수 있었다. 이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이런 와이즈먼의 물음에 운 나쁜 사람은 이 상황을 자신에게 일어나기 쉬운 일로 봤다. “내 인생이 원래 이렇잖아”, “∼했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생각했다. 삶에서 겪는 ‘수많은 불운이 하나 더 늘어났을 뿐’이었다. 반면 운 좋은 사람은 “총에 맞아 죽었을 수도 있다”, “머리에 맞았을지도 모른다”처럼 더 나쁜 상황과 직면했을 수도 있다는 ‘반사실적 사고(Counterfactual Thinking)’를 했다.
또 운 좋은 사람은 운 나쁜 사람과 비교했고, 운 나쁜 사람은 자신보다 운 좋은 사람과 비교하는 경향을 보였다. 결과적으로 운 나쁜 사람은 비교를 통해 애써 참담한 기분을 연출했고, 운 좋은 사람은 운 나쁜 사람과 비교함으로써 자신은 그리 심한 불운이 아니라며 자위했다.
이처럼 운이 좋거나 나쁜 사람 간엔 상황을 대하는 인식체계가 달랐고 결국 두 부류 운의 선순환‧악순환으로 이어졌다.
운은 ‘인식체계’와의 함수다.
글 _ 김광희 창의력계발연구원장 / 협성대학교 경영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