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LOBAL REPORT TREND - 미국]

“커리어는 사다리가 아니라 정글짐이다”
승진을 한다는 의미의 영어 표현 중 “climb the corporate ladder”라는 말이 있다. 수직적인 직급체계를 가진 조직에서의 승진을 한 단계씩 사다리를 오르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커리어 성장이라고 하면 대개 이와 같이 사다리를 타듯 다음 직급을 향해 위로 올라가는 것을 떠올린다. 하지만 사다리 위에서는 움직일 수 있는 방향이 제한적이다. 올라가거나 내려가는 이동만 가능하고, 만약 내 윗칸에 방해물이 있다면 올라가지 못하고 그 자리에 머무를 수밖에 없다. 
2012년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 졸업식 축사에서 메타의 전 COO 셰릴 샌드버그는 “커리어는 사다리가 아니라 정글짐이다”라고 말하며 새로운 커리어 성장 모델을 제시했다. 사다리에 비해 정글짐에서는 진행 방향의 선택지가 많다. 위에 방해물이 있다면 옆으로 이동해서 올라갈 수도 있고, 잠시 한두 칸 내려갔다가 새로운 길을 만들 수도 있다. 이렇게 커리어 성장을 ‘사다리 타기’가 아닌 ‘정글짐 오르기’로 생각하면 원하는 목표 지점까지 도달할 수 있는 커리어 경로(career pathing)가 다양해진다. 

조직 안에 커리어 정글짐이 필요한 이유
누구나 자신의 커리어를 정글짐으로 생각할 수 있듯이 조직 안에서도 직급과 직책들을 정글짐과 같이 설계할 수 있다. 환경이 사람의 심리에 영향을 미치듯 조직 구조는 구성원의 경험과 마인드셋을 형성한다. 정글짐 같은 HR 인프라는 구성원들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성장의 길을 만들어 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조직 안에 커리어 정글짐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사다리 같이 수직적인 성장만 가능한 조직에서는 성장의 기회가 자주 오지 않는다. 성장이 곧 승진을 뜻한다면 진정한 성장의 기회는 1년에 한두 번 실시되는 고과평가에 달려있는 셈이다. 다음 직급의 역량을 이미 갖췄어도 경기 침체나 사업 방향 때문에 팀의 성장이 더디다면 자리가 없어서 진급을 못하기도 한다. 
이미 어느 정도 높은 위치에 오른 구성원들에게 수직적 성장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그들도 직업적 성장을 중요하게 여긴다. 미국 내 많은 기업을 대상으로 한 몰입도 설문에서 “나는 전문적으로 성장하고 있다고 느낀다”라는 항목은 평사원 뿐만 아니라 임원들의 경우에도 업무 몰입도 또는 근속 의도(intent to stay)의 매우 중요한 견인 요소다. 오랜 기간 근무한 핵심 인력과 고위 임원들조차도 지금의 자리에서 성장의 기회가 없다고 느끼기 시작하면 조직을 떠난다. 
하지만 수직 이동 말고도 횡적 이동(lateral movement) 기회가 구조적으로 설계된 조직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정글짐과 같이 구성원들이 ‘옆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조직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IC/매니저 트랙
: 관리자가 되지 않아도 성장, 성공할 수 있는 조직

주니어 포지션에서 연차가 쌓이고 좋은 성과를 꾸준히 내고 있다면 팀을 이끄는 매니저가 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다음 커리어 단계이자 목표로 여겨진다. 팀원들을 관리하는 피플 매니저가 된다는 것은 단순히 책임이 커지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종류의 책임과 업무가 생기는 것을 의미한다. 팀을 위해 자원을 끌어오거나 방해물을 제거할 수 있어야 하고, 팀원을 뽑고, 성장시키고, 때로는 해고하기도 해야 한다. 업무 외적으로도 사람을 잘 관리하고 다른 매니저들 사이에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하는 피플 매니저의 역할이 성향에 맞지 않는 사람들도 있다. 미국 내 3,600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4%만이 매니저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사람이 관리직 밖에서의 커리어 성장을 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리자의 길이 아니라 담당 업무를 통해 조직에 기여하는 개인 공헌자(Individual Contributor, 이하 IC)로서 계속 커리어를 키워 나갈 수 있는 트랙이 있다면 성장의 선택지가 다양해진다. 구글, 메타, 아마존 등 미국 내 대부분의 테크 기업들은 IC와 매니저 트랙이 구분된 직급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다음 예시를 보면 하나의 트랙으로 직급이 올라가는 수직형 모델과 달리, 커리어 트랙이 구분되어 있는 모델에서는 일정 직급(e.g., 레벨5)부터 IC로 남을 것인지 매니저 트랙으로 들어설 것인지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된다. 쭉 IC 트랙에 있다가 나중에 매니저 트랙으로 건너갈 수도 있고, 반대로 매니저 트랙에서 IC 트랙으로 돌아올 수도 있다. 같은 레벨이라도 트랙에 따라 Staff Engineer 혹은 Senior Engineering Manager와 같이 다른 직함을 달게 된다.
조직에 이렇게 두 가지 커리어 트랙이 제도적으로 자리 잡혀 있고 같은 직급의 IC와 매니저를 동등하게 존중하는 문화가 있다면 관리자의 옷이 영 불편하게 느껴지는 매니저들도 퇴사라는 선택 대신 IC로 돌아오며 조직 내에서 ‘옆으로’ 이동할 수 있다.

▣ 수직형 직급 모델에선 실무자와 매니저가 일괄적으로 같은 직급 시스템을 따르게 된다. IC와 매니저 트랙이 나누어진 직업 건축 (Job Architecture) 모델에서는 커리어 트랙에 따라 직급이 구분되고 이에 따라 표준화된 직함을 갖게 된다.
▣ 수직형 직급 모델에선 실무자와 매니저가 일괄적으로 같은 직급 시스템을 따르게 된다. IC와 매니저 트랙이 나누어진 직업 건축 (Job Architecture) 모델에서는 커리어 트랙에 따라 직급이 구분되고 이에 따라 표준화된 직함을 갖게 된다.

직급별 역량 모델
: 효과적인 피드백을 위한 필수 가이드북

직급과 커리어 트랙이 정글짐의 구조 그 자체라면, 실제로 구성원들이 그 안에서 이동을 하기 위해서 어떤 노력이 필요한지 안내해 주는 지침서가 필요하다. 체계적으로 직무 구성(job architecture)이 이루어진 조직에는 보통 각 직급과 커리어 트랙에 따라 요구되는 역량을 상세하게 기술한 역량 모델이 수립되어 있다. 기능적 지식(functional knowledge), 문제 해결 능력(problem solving)과 같이 직급을 결정하는 핵심 기준들에 있어서 기대되는 역량의 규모와 범위를 구체적으로 문서화한 것을 일컫는다. 
한 조직에서 ‘문제 해결 능력’에 대한 역량이 다음과 같이 제시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만약에 IC5에서 IC6으로 승진하는 것이 목표라면, 매니저와의 면담을 통해 팀원들이나 사내 파트너들을 리드하며 이끌 수 있는 프로젝트 기회를 찾아보거나 분석적 사고를 위해 데이터를 활용하는 쪽으로 프로젝트 방향을 정할 수 있다. 물론 현재 직급인 IC5에 해당하는 역량을 이미 잘 발휘하고 있어야 한다. 매니저가 되는 것이 목표라면 문제 해결 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문제를 발견하는 데 힘쓰며 M5에 해당하는 역량을 보여줘야 한다. 이와 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 역량 모델이 중요한 이유는 이런 자료가 효과적인 피드백의 근간이 되기 때문이다. 역량 모델을 이용해서 커리어 면담을 진행하면 구성원은 더 명확하게 본인이 목표하는 다음 단계가 어디인지 말할 수 있고, 매니저는 이를 위해 구성원이 어떤 역량을 개발해야 하는지 구체적인 피드백을 주고 관련 업무를 배정해 줄 수 있게 된다.

내부 이동성(Internal Mobility)
: 구성원 성장과 혁신, 두 마리 토끼 잡기

자신이 보유하고 있는 기술과 역량을 이용해 회사 내부의 다른 기능으로 옮겨가는 내부 이동을 할 수도 있다. 많은 조직에서 내부 이동성 (Internal Mobility)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이전에 널리 쓰였던 내부 트랜스퍼(Internal Transfer)라는 용어와의 차이에 눈길이 간다. 다른 곳으로 보내진다는 뉘앙스의 ‘트랜스퍼’보다 주도적인 움직임을 의미하는 ‘모빌리티’라는 단어를 통해 부서 이동에 대한 선입견을 줄이고 이동이 구성원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핀터레스트의 경우, 내부 이동을 장려하기 위해 새로운 포지션을 사내 포털에 공개 채용보다 일주일 먼저 게시해 내부 지원자를 우선적으로 받는다. 포털에 접속하면 현재 본인의 직업군과 직급에 따라 내부지원을 할 수 있는 타부서 포지션을 맞춤형으로 추천해 준다. 이 외에도 사내 이동률과 내부 오퍼수락률과 같은 수치를 부서별로 추적해 원활한 사내 이동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분기별로 모니터링 한다.

▣ 피플 애널리틱스팀에서 데이터 분석을 담당하고 있는 필자는 엔지니어링 팀 내 광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팀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포지션을 추천 받았다.
▣ 피플 애널리틱스팀에서 데이터 분석을 담당하고 있는 필자는 엔지니어링 팀 내 광고 데이터를 분석하는 팀의 데이터 사이언티스트 포지션을 추천 받았다.

본격적으로 부서를 옮기지 않고 새로운 역할을 탐색해 볼 수 있도록 로테이션 프로그램이나 사이드 프로젝트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기업들도 있다. 구글은 ‘20% 시간’ 제도를 통해 구성원들이 새로운 직책과 프로젝트를 경험할 수 있게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다. 회사 상장 이후 20년간 이어져온 이 정책은 구성원들이 업무 시간 중 20%를 본인의 코어 업무 이외의 프로젝트에 쓸 수 있도록 한다. ‘구글에 꼭 필요한 일’로 여겨지는 일을 자율적으로 정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구성원들의 업무 만족도와 몰입도가 상승됨은 물론, 애드센스(AdSense)나 지메일(Gmail)과 같은 혁신적인 프로덕트 라인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배출되었다. 링크드인은 2012년 개발자 구성원들을 대상으로 ‘인큐베이터’ 프로그램을 시작, 데모 발표를 통해 선발된 프로젝트에 한해 개발자 구성원들이 본인의 업무가 아닌 사이드 프로젝트에 풀타임으로 3개월까지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이 외에도 옆으로 이동하고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다. 같은 직급 안에서 업무 영역을 확대할 수 있고, 타 부서의 구성원들과 함께 일하는 프로젝트에 참여함으로써 다기능(cross-functional) 협업 능력을 키울 수도 있다. 정글짐과 같은 HR 인프라는 구성원들이 이와 같이 다양한 방향으로 커리어 개발의 경로를 만들어 나가고 성장에 대해 더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도록 유도한다. 만약 지금 조직의 구성원 성장 모델이 사다리 모양이라면 위가 아닌 옆으로 움직일 수 있는 막대기 하나를 어떻게 그릴 수 있을지 생각해 보길 바란다. 


글_이피어나 Pinterest People Research Scient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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