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이라 쓰고 ‘성과’라 읽는다

풍요가 만든 인식의 변화
지난 20세기 사회의 지배 원리 중 빼놓을 수 없는 것 하나를 꼽으라면 평균주의를 들 수 있다. 평균주의를 기반으로 통제시스템을 만들고 효율을 극대화함으로써 기업들은 번창을 누렸고 소비자들은 보다 양질의 상품을 저렴하게 구매하게 됐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한편에서 우리는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사회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존엄이 상실된 것이다.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함은 성공으로 나아가기 위한 여정 앞에 놓인 짐이거나 장애물, 아니면 후회하게 될 한눈팔기쯤으로 전락해버렸다. 회사의 직원들은 언제든 대체 가능한 대상이라는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느끼며 일한다. 뛰어난 역량 발휘가 시스템에 대한 순응보다 우선시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21세기에는 개개인의 독특함과 창의가 더 중요해진다고 말하지만 누가 봐도 여전히 개인보다 평균에 기반한 시스템이 중요하게 설정돼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동안 풍요와 맞바꾼 존엄을 되찾고 싶어하고 있다. 지식정보화와 디지털화에 기반한 의학, 과학, 공학의 진보, 그리고 예측불가 변화의 일상화는 우리 자신에 대한 관심과 집중을 증폭, 그간 평균이라는 저해상도의 틀 안에서 만났던 우리 자신을 좀 더 고해상도로 보고 싶어지게 만들었다. 갈수록 세상의 불확실성이 증대되니 결국 기댈 수 있는 확실성은 오직 자신으로부터 나올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의 자기인식과 자기결정, 그리고 이를 드러내는 자기표현, 즉 자기애는 20세기보다 훨씬 더 수면 위로 올라왔다. 아무리 시스템이 방대해지고 고도화되어도, 그래서 그 안에서 엄청난 부가 창출된다 해도, 사람은 시스템 안의 부속품이 아니라 독립된 주체로서의 존재감을 갈구하기 마련이다. 망망대해를 홀로 헤맬지라도 자신의 목적지를 찾아 떠나고 싶어하는 것이다. 타의가 아닌 자의로 동력을 발휘해 성과를 내며 존재감과 성장감을 맛볼 기회를 만나고 싶은 욕구는 이제 조직생활의 사치가 아니라 조건으로 간주되고 있다. 일터가 생계에 필요한 것들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곳을 넘어 이제 자기애 실현 욕구를 건강하게 충족시키고 자신의 부가가치를 창출해 가며 세상과 의미 있는 관계를 극대화해 가는 기회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만들었다.

일터에서의 자기애 실현 프로젝트
자신과 일, 일터에 대한 이러한 인식 변화는 20세기 조직 경영방식에 기반한 조직과 리더십에 커다란 도전이 되고 있다. 관리와 통제 기반의 기존 조직 운영 체계에 개별 구성원의 존중 욕구, 성장지향은 실로 부담인 것이다. 일터에서의 자기실현을 지원하겠다고 천명하는 순간 조직에는 구성원 수만큼의 ‘다양성(Diversity)’이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되고 이는 곧 관리 통제의 어려움과 비효율 증대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고 예측을 불허하는 이른바 VUCA(Volatile Uncertain Complex Ambiguous) 환경에서 조직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이 주체적 문제해결자로서 일당백이 되어야 한다. 일터에서 구성원의 ‘몰입’된 모습을 목격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20세기보다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갤럽의 2022년 글로벌 직장 보고서에 따르면, 업무에 적극적으로 몰입하지 않는 직원들로 인한 회사의 생산성 손실은 전 세계적으로 연간 7조 8천억 달러로 추산되었다. 이는 놀랍게도 2020년 기준 전 세계 GDP의 11%에 달하는 규모다. 그런가 하면, 직원의 업무 몰입도가 높은 조직은 낮은 조직보다 업무 생산성이 18% 높고, 직원 이직률은 43%가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직원의 업무 몰입이 회사 운영에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잘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일과 일터에 대해 보다 개별적이고 개인주의적 관점을 가지게 된 구성원들이 일터에서 몰입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제니퍼 딜(Jennifer J. Deal)과 알렉 레빈슨(Alec Levenson)의 연구에 따르면 63%의 직원들은 충분한 보상을 받는 좋은 직장을 가지고 싶어하지만, 일 때문에 자신의 삶의 질을 희생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고 답했다. 그렇다고 이들이 일을 싫어하거나 못하거나 게으른 것은 아니다. 이들도 기꺼이 일 중심이 될 수 있다. 단 까다로운 조건이 하나 있다. 일에 몰입하려면 그 일이 자신에게 의미있고 세상에 긍정적 영향력을 끼치는 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이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을 넘어서서, 세상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연구 대상자의 92%는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일이 본인에게 중요하다고 말했으며, 88%는 지역사회를 위한 활동과 자선활동에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세상에 좋은 일을 하며 이 일이 자신의 커리어 전략과 어떻게 일치하는지, 그리고 이 일을 통해 어떤 수혜가 있을지에 대해 염두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과 일터에 대한 개인주의적 인식 변화는 주변으로부터의 인정욕구를 크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철저히 독립적이게 한다. 인정욕구란 일터에서 적절하고 적시적이며 충분한 피드백이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연구 대상자 중 73%가 조직 내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조언을 해주고, 인정과 칭찬, 피드백을 통해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이 지원과 피드백, 인정을 원한다고 해서 조직이나 타인에게 의존적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인정욕구가 크지만 동시에 철저히 독립적이다. 이들은 합의된 형태의 피드백 외의 간섭과 참견, 이른바 빨간펜 선생식의 미주알고주알을 정중히 사양했다. 방향과 핵심 진행 방식, 산출물에 대해 합의하였다면 디테일에 대해서는 주도적으로 추진해 나가도록 자유도와 재량권이 주워지기를 원했다.
이러한 풍경을 ‘일터에서의 자기애 추구’라 표현해 볼 수 있겠다. 일을 통해 자기실현의 모멘텀을 경험하고 이를 통해 존재감을 만끽하는 것은 자기애를 구현하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시건 대학의 스프라이처(Gretchen Spreitzer) 교수는 매력적인 조직이 되려면 ‘직원번영(People Thriving)’을 조직운영원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직원번영이란 직원 스스로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업무를 통해 성장하면서 삶의 활력을 얻는 것을 의미한다. 구성원들이 일터에서 보이는 ‘몰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그간 성과와의 관계연구를 통해 많이 알려져 왔는데 구성원들의 이 몰입을 만들어 내는 핵심 선행지표로 스프라이처 교수는 번영감에 주목한 것이다. 번영감은 업무를 통해 직원 스스로 의미있는 성장을 체감하는 데서 얻어지는 것인데 직원들이 일을 통해 번영감을 만끽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회사에 몰입이라는 루틴을 만들게 된다는 것이다.

몰입 메커니즘의 중심 번영
이를 실제 조직 운영에 반영하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를 만나 보자. 마이크로소프트는 우선 직원들이 ‘번영’하고자 하는 욕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정의를 명확히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즉, 매슬로의 욕구 단계설에 착안해 직원의 번영 욕구를 보상/복지/동료애/자긍심/목적의식의 5단계로 정의했다. 그리고 직원 각각의 번영 욕구 단계를 명확히 체감할 수 있도록 개별 욕구를 회사의 제도와 연결했다. 이를테면 성과급 확대, 주식 보상, 가족 케어 프로그램 등은 대부분의 직원이 회사에 바라는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으로 보았고, 회사에 대한 자긍심, 일에 대한 목적의식 등 보다 고차원적인 욕구가 부족함을 확인하고, 이를 충족시킬 수 있는 프로그램을 추진했다. 대표적인 것이 ‘AI for Good’ 프로그램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보유한 AI 기술을 활용해 시각 장애인의 사물 인식 지원 사업을 추진하는 것인데, 이를 통해 직원들이 ‘우리 회사는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는 자긍심과, 자신이 세상과 사회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목적의식을 갖도록 해, 직원 스스로 번영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또한 마이크로소프트는 직원들이 자신의 ‘번영’을 이끌어주는 리더의 모습을 기대하고 있음에 주목했다. 직원이 성장을 체감하는 데 있어 리더의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함을 인지한 것이다. 이에 따라 리더가 직원들의 성장을 응원하고, 또 충분히 지원하고 있다는 정서가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 1차 목표가 되었다. 이를 위해 마이크로소프트는 리더십 진단에 ‘직원 경력지원’, ‘관리자의 효과성’ 등의 항목을 추가했다. 리더가 직원의 성장을 얼마나 돕는지 살펴보겠다는 것인데, 리더는 직원들의 번영하고자 하는 욕구를 얼마나 지원하고 있는지 그 정도를 체크하는 한편, 이를 6개월 단위로 반복해 회사 전반에 직원의 ‘번영’을 추구하는 문화를 조성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세 번째로 주목한 사실은 직원들이 회사가 자신을 잘 활용하고 있다고 인식할 때 ‘번영’을 체감한다는 것이었다. 회사는 이런 사실에 근거해 마냥 쉽고 편한 업무를 부여하기보다는, 직원들의 보유 역량과 성장 의지를 감안해 도전적 프로젝트에 투입하고자 했는데, 직원들은 어려운 미션을 부여 받으면 회사가 자신을 인정했기 때문이라 생각하고, 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성취감을 느꼈다고 한다. 실제로 마이크로소프트 직원 대상 설문조사 결과, 회사가 자신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하고 있다고 느낄수록 ‘번영’을 체감한다고 조사되었다. 이 경우 일과 삶의 균형까지 양보할 정도로 몰입하며, 그 결과 직원들의 주당 업무 집중시간이 3시간 늘어날 정도로 업무 생산성이 높아지는 효과가 있었음을 보고하고 있다.

구성원 번영감부터
개별화, 개인주의 경향이 심화될수록 자기애의 추구도 높아진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일터는 당연히 자기애 실현의 주요 무대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일터에서 자신의 특장점이 존중되고 이를 일과 연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음으로써 조직기여와 개인성장을 경험한 구성원들은 이를 통해 찐한 번영감을 보상받게 된다. 번영을 체감한 직원의 업무 몰입도와 생산성, 회사에 대한 로열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회사가 번영해야 직원들도 살길이 열린다 했다. 그러니 자신을 내려놓고 회사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미덕으로 통용되었다. ‘속도’와 ‘효율’ 본위의 시대, 20세기에는 나름 설득력이 있었다. 하지만 ‘방향’과 ‘효과’로 방점이 옮겨가고 있는 21세기에는 표현이 좀 달라져야 할 것 같다. 구성원이 번영감을 맞봐야 회사의 살길이 열린다. 


글_박정열 현대자동차그룹 경영연구원 전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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