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REPORT - 초불확실성 시대의 생존 키워드: 변화를 주도하는 ‘조직문화'
최근 메타(옛 페이스북)가 전 직원 중 5%를 줄이겠다는 계획이 공개됐다. 이 소식은 삽시간에 메타 구성원뿐만 아니라 실리콘밸리 테크기업 종사자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메타는 2022년 11월 이후 지금보다 규모가 큰 두 차례의 레이오프(인원 감축)을 진행했지만 세 번째 레이오프가 주는 여진은 차원이 다르다. 첫 레이오프는 주로 사업 단위의 조직 개편을 하는 방식으로, 회사의 방향성을 재점검하고 이에 맞지 않는 사업을 중단하면서 팀 단위가 통째로 사라졌다. 몇 달 간격으로 진행한 두 번째 레이오프에서는 매니저 규모를 줄였다. 비용 효율성 측면에서 진행된 두 차례의 레이오프와 달리 이번에는 ‘생산성’ 카드를 내세웠다. 공개된 메모에서 마크 저커버그 메타 최고 경영자(CEO)는 “올해는 치열한 해가 될 것이고 우리 팀이 최고의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다”는 의중을 내비쳤다. 하위 5%가 회사를 떠나면 상당한 규모를 이른 시일 안에 수혈하겠다는 후속 조치까지 알려졌다. 물론 더 높은 성과를 낼 인재들로 말이다.
한동안 인재풀을 뺏기지 않기 위해 무작정 규모를 늘리 고 성장을 추구하던 테크 기업들이 기조를 바꿨다. 매출과 순이익의 성장보다 ‘1인당 생산성’을 가장 높은 우선순위 에 두기 시작하면서 규모가 큰 기업에게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비효율을 없애고 ‘A급 플레이어’로만 팀을 구성하겠다는 것. 경기 침체와 불확실성이 장기화되는 동시에 인공 지능(AI) 에이전트가 등장하면서 나타난 변화다. 이 과정에서 실리콘밸리 기업들 사이에 새로운 롤모델로 부상한 곳은 엔비디아다. 지난달 진행된 세계 최대 정보기술(IT) 박람회인 CES 2025에서 젠슨 황 엔비디아 창업자 겸 CEO는 ‘로보틱스의 챗GPT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는 메시지를 내놓으며 로봇과 자율주행차들이 주체적으 로 움직일 수 있는 기반인 물리 인공지능(Physical AI)의 비전을 제시했다. AI 시대를 이끌 수 있는 기업인 것은 물론이고 많은 기업들이 치켜세우는 부분은 압도적으로 높은 1인당 생산성이다. 직원 생산성의 주요 지표로 꼽히는 1인당 매출(RPE)의 경우 2023년 기준으로 398만 달러를 기록했다. 충분히 큰 숫자지만 같은 기간 비교군 기업들의 RPE를 보면 더욱 놀랍다. 2위를 기록한 애플이 238만 달러를 기록했고 메타(215만 달러), 알파벳(187만 달러) 순으로 집계됐다. 생성형 인공지능(AI) 붐이 가시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한 지난 해의 경우 RPE의 격차는 더욱 커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2022년 하반기 이후 메타, 아마존, 구글 등 실리콘밸리 대표 기업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대규모 레이오프를 진행할 때도 엔비디아는 거의 유일하게 이를 피해간 회사다. 모바일 시대를 풍미했던 구글과 애플의 저력이 흔들리는 지금 많은 이들의 시선은 엔비디아로 쏠린다.
“우리는 지구상 가장 작은 대기업입니다.” 젠슨 황은 지난해 4월 미국 스탠퍼드대 MBA 학생들과 진행한 대담해서 엔비디아를 이같이 소개했다. 이 글을 쓰는 현재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3조 3000억 달러에 달해 전체 기업 시총 2위를 차지하고 있는 회사가 ‘가장 작은 대기업’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이유를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직원 3만 명 정도로 작은 회사지만, 모든 직원들이 권한을 부여받아서 매일 같이 저를 대신해 현명한 결정을 내리고 있습니다.” 젠슨 황이 말한 지구상 가장 작은 대기업의 성공 이유를 엔비디아의 언어로 다시 해석해 보면 이렇다. ‘지적 정직함’을 바탕으로 ‘원팀’을 구축하고 이들이 ‘빛의 속도’를 내서 끊임없이 이전의 엔비디아를 뛰어넘는 혁신을 추구하는 것. 엔비디아를 오늘날의 절대적인 강자로 만든 세 가지 핵심 가치를 짚어보자.
지적 정직함 엔비디아인이 모든 업무 과정에서 구성원으로서 ‘양심’의 잣대로 삼는 가치는 지적 정직함(Intellectual Honesty)이다. 이는 엔비디아가 기업 문화 공식 자료에 유일하게 내세우는 가치일 정도로 근본적인 핵심 가치로 꼽힌다. 우리나라에는 비교적 낯선 개념이지만 이는 개개인에게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는 자기비판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과 동시에 자신에 대한 피드백에 열려 있는 자세를 의미한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이를 위해서 ‘의도된 합리화(Motivated reasoning)’의 가능성을 배제하는 게 중요하다. 많은 이들이 평소 자신의 선호, 선입견이나 부서별 이해관계 등에 따라 잠재적으로 세운 결론에 부합하는 단서들을 바탕으로 의사결정을 내린다. 이를 배제하기 위해 작은 의사결정을 할 때도 ‘제1원리 사고(일체의 추정을 배제하고, 가장 근본적인 사실이나 물리 법칙에 입각해 전제를 새롭게 세우는 사고방식)’으로 돌아가 단계마다 합리적으로 추론해 그 결론이 자신의 선호, 선입견을 비롯해 부서별 이해관계를 벗어난 일이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이는 자세다. 쉽지 않은 수준의 지적 정직함을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엔비디아가 ‘값싼 실패’를 권장하기 때 문이다. 실패를 하더라도 이를 최대한 빨리 인식하고 바로 잡으면 문제가 없지만 이를 덮어두고 문제를 키우면 돌이 킬 수 없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게 전 구성원이 공유하는 지론이다. 회사를 세우고 32년간 이끌어 온 젠슨 황조차 추진하던 일을 재점검했을 때 이 방향이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구성원에게 투명하게 소통하고 이를 바로잡는 것을 습관화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엔비디아의 오래된 전통인 ‘실패 공유 프레젠테이션’이다. 2003년 3월 엔비디아는 창업 10년 만에 강력한 경쟁사였던 ‘부두’ 그래픽카드 개발사 3dfx를 인수한 뒤 야심작을 준비했다. ATI테크놀로지스의 라데온 9700 시리즈와 승부를 보기 위해 성능을 끌어올리는 과정에서 발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려다 악수(惡手)를 뒀다. 헤어드라이기 같은 괴상한 생김새에 80데시벨에 달하는 소음을 내는 흉물이 되고 말았다. NV30 아키텍처 기반의 지포스FX 5800은 역대급 망작으로 꼽혔고 각종 밈이 양산돼 희화화됐다. 위기의 상황에서 엔비디아는 1500명이 넘는 직원들을 모두 모아 놓고 모든 선택의 과정을 점검하는 실패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다. 이 프레젠테이션을 이끌어야 하는 이들은 당시 제품 개발 책임자들이었다. 가슴이 쓰린 일이었지만 특정인을 문책하는 대신 잘못된 선택의 과정을 복기하고 무엇을 배울 것인지가 중요하게 다뤄졌다. 다음 해 엔비디아는 전작의 제품 개발을 책임졌던 이들로 다시 팀을 꾸려 후속작 NV35 아키텍처 기반의 지포스FX 5900을 출시해 다시 선두의 발판에 설 수 있게 됐다. 실패를 인정하는 순간 실패는 성공의 단초가 된다는 교훈이 수차례에 걸쳐서 엔비디아 구성원 사이에 확립됐다. 지금은 당시에 비해 규모가 20배가량 커져 전직원이 참여할 수는 없지만 제품을 만들 때마다 프로젝트별 전 공정에서 이 같은 프로토콜을 내재화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