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김 다이어리

 

우리 팀은 2주 연속 풀가동 중. 신입사원 20명 입사, 임직원 경조사 32개, 퇴사자 소송, 임원 워크숍, 사무실 인테리어 공사까지 안 그래도 1일 8시간은 기본업무로 꽉꽉 채우는데 이번 달은 해도 너무했다. 경조사나 소송이야 어쩔 수 없다지만 나머지 일들은 일정을 좀 봐가며 조절해도 될 것을 굳이 속도전쟁을 치르려는 대표님의 본능에 힘없는 노동자들만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다. 영업부서 퇴사자가 회사를 상대로 퇴직금 청구관련 소송을 낸 건으로 본부장님과 팀장님이 거의 현업을 못보고 계시기 때문에 직원 셋이 일을 나눠 하다 보니 결재도 늦고 이래저래 제동이 걸려 엎친 데 덮쳤다. “신형 씨 나 마케팅팀 한소라. 그룹웨어에 내 연차가 이상해. 이번 달에 남은 연차 다 쓰려고 하는데 날짜 좀 확인해줄래?” 바빠 죽겠는데 한가롭게 연차일수 확인이라니, 무개념으로 소문난 그녀를 배려할 마음은 애당초 없던 터라 나는 수화기를 그냥 내려버렸다. 다행히 다시 벨이 울리지 않아 망정이지 만약 또 걸어서 왜 끊어졌냐 물었다면 “지금 나랑 장난하냐? 연차 같은 소리 하네. 일이나 해!”하며 소리 지를 뻔했다. 한 숨 돌리고 시스템을 확인해보니 연차일수 계산에 문제가 있어 업체에 수정요청을 하고 소라 씨에게는 메일로 알려주는 것으로 마무리. 날이 갈수록 신경이 예민해지는 것 같아 이번 전쟁만 치르고는 나도 연차라는걸 좀 쓰고 강릉으로 바람이나 쐬고 와야지 싶다. 오후는 신입사원 입사교육 마지막 차수 진행이라 점심도 간단히 김밥으로 해결하고 부서별 교육담당자 호출, 교육장에서 강의 자료랑 장비 확인하고 나오는데 누군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안녕하세요. 신입사원 최민호입니다. 여쭤볼 게 있는데요. 저희 회사 출근시간이 8시 30분, 퇴근시간이 6시 30분이라고 교육 첫 시간에 들었는데 이게 급여에 반영된 건가요?” 하…… 말쑥한 차림에 순진무구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온 신입 사원이 인사총무팀 직원에게 처음으로 하는 질문이 근로시간과 추가근무수당에 관한 실로 구체적인 내용이라니. ‘그래 당연히 궁금한, 궁금해야 할 사항이지’ 생각이 멈칫 들었다가 조금 황당하기도 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을 쉬어버렸다. “근로계약서 자세히 보시면 아실 거예요. 제가 설명드릴 부분은 아니고 더 궁금하시면 나중에 인사팀장님이나 본부장님하고 따로 말씀 나누시면 될 것 같아요.” 그의 미소가 뭘 의미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감사하다며 활짝 웃고 돌아가는 모습이, 지금 우리 팀이 한창 골머리를 앓고 있는 소송과 맞물려 묘한 기분이 들게 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입사할 때에도 무척이나 불만스러웠던 부분이 출퇴근 시간이었다. 출근이야 여유롭게 업무 준비하라는 의도로 30분 일찍 나오라면까짓것 조직의 일원으로서 통 크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추가근무 수당도 없이 의무적으로 퇴근시간을 늦추다니 이건 엄연히 위법이다. 마구 흥분하며 직원들과 뒷담을 하던 입사 당시의 당당함은 어디 가고, 이제는 야근이 당연시 된 분위기에 젖어 나도 모르게 신입사원의 질문을 어이없다고 생각하는 지경이라니. 많이 찌들었구나 신형…… 하루 8시간 더하기 1시간, 총 9시간의 기본 근무에 최근 2주는2~3시간씩 추가로 일을 했으니 이걸 시간단위 아르바이트로 계산하면 한 달에 최소 30~40만 원은 더 받아야 하고 연봉으로 치면 앞 단위가 바뀔 수 있는 고액이 된다. 물론 업무시간 중 커피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일이 정말 없거나(입사 이래 그런 날은 없었다) 미친 듯이 귀찮은 날은 웹 서핑도 하면서 공치는 때도 있지만 결론적으로 봐서 직장생활은 근로자가 늘 손해 보는 입장이다. 기술직이 아닌 일반사무직에서 야근수당 챙겨 받기란 쉽지 않고 특히나 일이 정량화된 경우가 아니라면 일하는 티내기도 어렵다. 세상모든 직장인들이 자기 자신이 제일 고생하고 대접 못 받고 일한다 하겠지. 그래, 다들 고생이 많다. “저녁 먹고 합시다.” 들어선 설렁탕 가게에서 테크팀 직원들을 몇 만났다. 빈자리가 바로 옆 테이블이라 합석 아닌 합석을 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대화는 내가 오늘 종일 고민하고 억울해 한 것들과는 대조적이었다. “야, 오늘은 공격 한 번 하자. 나 마법사 하나 더 생겼어.” “난 다 털리고 군대도 없어. 있다 좀 지르던지 상황 봐서.” “본부장 없으니까 시간 보내기 좋네. 개발 건은 언제가 기획 마무리야?” “큰 거 아니니까 다음 주쯤 회의할거야. 그 전까지는 일 없어.” 뒤로 이어지는 얘기는 회사에서 관리자 몰래 한 게임, 마누라 몰래 한 쇼핑, 점심 먹고 한 시간 넘게 옥상에서 내기 탁구 치고 내려왔다는 등 여유와 재미 넘치는 소재들이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건, 가장 야근을 많이 하기로 소문 난 테크팀 사람들이 실은 그들끼리의 리그를 즐기느라 사무실을 놀이터로 쓴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일이 몰려 집중하고 고생할 때가 더 많겠지만 지금 저들이 즐기는 시간이 나에게는 왜 허락되지 않느냐는 거다. 회사는 내게 불공평하게 굴고, 동료마저 배신이니 열심히 일하고 잔머리 못 굴리는 나만 바보인가?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가 컸던 탓일까 오늘 아침은 눈 뜨니 8시다. 정신없이 챙겨 나갔는데도 회사 도착하니 벌써 9시 반. 지하에서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헉’ 이런 날벼락이, 대표님이 타고 계신다. 간단히 목례만 하고 앞을 보고 섰는데 뒤에서 꽂히는 시선이 뜨겁다.

‘대표님, 아니에요. 저 평소에 지각 거의 안하고 요즘 매일같이 9시 넘어 퇴근했어요. 그러니 제발 오해 마세요.’ 미처 하지 못한 화장과 옷매무새도 가다듬을 겸 화장실을 들어서는데 주책없이 눈물이 난다. 짊어져야 할 의무만 가득하고 여유는 부릴 수 있는 자들만의 특권이고, 나는 어디에 하소연을 할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옛 말이 있는데 싫은 게 아니고 억울하단 말이다. 내 시간, 노력에 대한 정당한 보상의 의무는 누가 지나? 인사평가를 아무리 잘 한들, 성과가 아닌 성실히 하루하루를 만들어 가는 나와 같은 직원들에겐 급여인상이나 진급 또한 시간과 버티기 싸움이다. 날은 춥고, 아침부터 지각에 마음은 무겁고, 늦은만큼 또 열심히 일하는 수밖에. 그나마 위로는 오늘이 급여일이라는 것. 다시 힘내보자(지난달 쓴 카드 값, 기억나니 안 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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