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민의 세상보기

“애플은 늘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 있었다.” 터틀넥 셔츠에 청바지, 뉴발란스 신발을 신고 그 특유의 파란색 화면 앞에서 스티브 잡스가 던진 이 한 마디는 엄청난 충격파를 던졌다. 특히 한국에. “거봐! 천재성과 창의성은 인문학에서 나온다니까, 그동안 인문학을 등한시했기 때문에 우리가 발전이 없었던 거야!” 스티브 잡스의 선문답 같은 선언에 큰 깨달음을 얻은 한국의 CEO들은 개과천선하는 마음으로 그때부터 뒤늦게 인문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래서? 우리 CEO들의 창의성 지수가 좀 올라갔나? 물 만난 듯이 인문학이 해법이라고 말하는 그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다. “잡스가 아이폰을 만들 때 영감을 준 고전이 대체 뭔데요?” 최근 구글의 인사담당 부사장 라즐로 복(Laszlo Bock)이 ‘구글이 일하는 법(Google Work Rules)’을 소재로 한『우린 잘 났다』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 ‘뭐, 이런 류의 책이야 이전에도 계속 나왔던 거고, 또 걔네들 잘난 거야 두말할 필요 없으니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놀라웠던 건 그걸 번역한 이경식이라는 사람이다. 뻔하디 뻔한 그 책의 제목을 ‘구글의 아침에는 자유가 있다’로 바꾸어버렸다. 그 번역자가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평소에 존경하는 톡톡 튀는 감수자 ‘유정식’이 범인인지는 모르겠지만 592쪽이나 되는 그 두꺼운 책의 핵심을 ‘자유’라는 키워드 하나로 ‘쫑’ 쳐버렸다. ‘자유!’ 그게 핵심이다. 다시 잡스로 가보자. 잡스가 말했다는 원문은 ‘Apple has been always existed between technology and liberal arts’이었다. 잡스는 그때 인문학(Humanity)을 말한 것이 아니라 ‘liberal arts’, 자유의 기술을 말한 것이다.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네이버는 ‘liberal arts’를 ‘문법, 수사, 변증, 수학, 기하, 음악, 천문 등 고대 그리스로마에서 자유시민에게 필수적인 교양’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디에도 역사나 철학은 없다. ‘liberal arts’는 원래 고대 그리스의 자유시민이 자유인의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지적 자질과 태도를 말하는 거다. 그런데 그걸 인문학이라고 누가 우겼고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다시 구글로 돌아가자. 내가 듣기로는 28일 동안 집에 안 가고 사무실에서 먹고 자면서 일한 게 그 회사 기록이라고 알고 있다. 그렇게 맨날 회사에서 밤새우는 직원들한테 개를 집에 두고 오라고 하면? 그 개가 굶어 죽을 수 있으니까 사무실에 ‘개 데리고 와도 된다’고 했다는 그 살벌한 직장에서 새삼스레 무슨자유타령이람? 살벌함은 애플도 마찬가지였다. 한때 잡스의 수하들은 1주일에 100시간씩 사무실에서 일을 했다고 한다. 주말 없이 매일을 14시간씩 일하면 딱 100시간이다. 이래 놓고 무슨 자유시민이냐고! 노예도 이렇게는 안 시켰겠다. 거기다가 당시의 잡스는 세계에서 가장 부하직원들을 잘 갈구는 ‘울트라 사이코’로 유명했는데. 그런데도 걔네들은 잡스가 선물한 ‘해적이 되자’라고 쓰인 해괴망측한 셔츠를 입고 그 난리를 쳤었다. 누가 이런 소리를 하기에 발끈 화를 내준 적이 있다. “구글은 호텔 세프급 주방장이 하루 세끼를 다 공짜로 준대요. 회사 안에 쉬고 잠잘 수 있는 공간도 있고요, 세탁서비스, 음료, 간식도 모두 공짜래요. 거기다 스포츠 마시지도 언제든지 공짜로 받을 수 있고요, 회사 내에 스포츠센터, 병원도 다 공짜로 이용할 수 있대요. 이쯤 되니까 다들 죽도록 일하는 거 아니겠어요?” 그때 발끈하면서 했던 말이 “남이 그렇게 환경을 만들어 주면 내가 열심히 일한다는 식의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노예들이나 가지는 거지 근성이야!”였다. 직원들이 맨날 밤새워 일하니 밥 사먹을 시간이라도 아끼라고 밥을 해 먹이는거고, 어제 밤새고 오늘 또 밤새워야 하니까 안쓰러워서 마시지 좀 받고 잠시라도 눈 좀 붙이라고 시스템을 정비해놓은 것 뿐이다. 예전에 이런 분들이 계셨다. 싸움을 한판 하게 생겼는데 이쪽은 12명, 저쪽은 어림잡아도 130명은 족히 넘었다. 붙으면 이쪽이 박살날 게 뻔한 걸 알면서도 이쪽은 정말이지 목숨 걸고 맞짱을 떴다고 한다. 400년 전 ‘명량’에서 있었던 일이다. 이쪽은 왜 질 게 뻔한 싸움임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았을까? 설마 좋은 평가를 받고 연말 성과급을 많이 받기 위해서? 올 연말에 내 승진이 걸려 있어서? 아니면 캠프에 호텔 셰프급 주방장이, 마사지가, 스포츠센터가 있어서? 그들에게는 싸워야 할 이유가 있었다. 지켜야 할 나라와 가족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자유인’이었던 거다.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했던 <300>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훌떡 벗은 식스팩의 스파르탄들은 왜 뻔히 죽을 걸 알면서도 뚜벅뚜벅 적장을 향해 돌진했을까? 자유시민으로서 쪽팔리기 싫었기 때문이다. 애플의 직원들은 똘아이 같은 스티브 잡스를 좋아해서 거기서 일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주에 흔적을 남겨보려는 잡스와 같이 일하면서 세상을 바꿔놓고 싶었던 것뿐이다. 자유인으로서 말이다. 구글러도 마찬가지다. 세상의 정보가 차고 넘쳐서 어린 네티즌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펴지 못하는 걸 보고, 그 정보들을 가로세로 깔끔하게 정리해서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뿐이었다. 그래서 대가 없이 밤을 새우고 또 새우는 것이다. 자유인으로서. 그런데 말이다. 우리에겐 그게 없다. 왜 일해야 하는지, 그 이유가. 우리는 여전히 MBO의 연말평가와 성과급의 노예일 뿐이다.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우울하고, 그래서 감옥 같은 이 사무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데 최근 나는 ‘자유인’의 냄새를 충분히 맡고 있다. 어마무시한 메르스 앞에서 우주복(방호복)을 입고사투를 벌이는 그들을 보면서 말이다. 결코 MBO가, 성과급이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들은 존경 받아야 할 자유시민이다. 전영민 롯데인재개발원 인재경영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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