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김 다이어리

“명절 앞두고 결혼이라니, 너무하잖아. 여름휴가 때 쓴 카드 값은 언제 다 갚냐고. 환장할 노릇이네.” “대리님은 먹여 살릴 처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늘 끙끙 거려요?” “혼자 살면 돈 안 드냐? 똑같은 처지에 잘 알면서 그래. 일 하느라 좋은 시절 다 보내고 나이 먹고 돈은 안 모이고, 처량하다 처량해. 그러고 보면 한 대리는 운도 좋아. 회사에서 일도 하고 연애에 결혼까지. 신형, 나는 어때?” “대리님, 가족끼리 그러는 거 아닙니다.” 작년 연말, 회사에서 나랑 가장 친한 CS팀 민이와 영업팀 한 대리님과의 밀애를 처음 알게 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전사가 다 아는 우리 회사 공식 1호 커플이 되었다. 모든 여직원들의 로망이었던 그와 예쁘장하고 애교 많은 민이의 만남을 모두가 축복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워했다. 연애 5개월 만에 결혼 얘기가 나왔고 9월, 명절을 코앞에 두고 청첩장이 돌았다. “민이 씨 너무 좋겠다. 남편이랑 한 직장이면 출퇴근도 같이 하고, 괜히 딴짓하는지 의심할 필요도 없고. 이번에 회사에서 걷어가는 돈만 얼마야?” “근데 사내결혼은 난 안 부럽네. 집도 회사도 감옥이 따로 없잖아.” 사내커플을 부러워하는 싱글남녀와는 달리, 유부남들은 그들만의 연대감으로 몸을 떨었다. 결혼은 사랑을 또 하나의 일거리로 만드는 과정이라나. 24시간 부인의 감시체제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게 바로 생지옥이라고 입을 모았다. “최 대리, 연애는 해도 결혼은 최대한 늦게 해. 일에 미쳐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아. 야근, 술자리, 여가생활 전부 다 눈치 안보고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행복한 건지 모르지. 신혼 그거 잠깐이야. 애 키우기 시작하면 눈 뜨고 눈 감을 때까지 하나같이 다 일이야.” 대화는 점점 ‘결혼지옥, 독신천국’의 모양새로 흘러갔다. 그들의 연애시절로 돌아가 보면 모두가 사랑해서, 예쁜 가정을 꿈꾸며 시작했을 터. 왜 사랑이 또 하나의 ‘일’로 변질됐을까? 어느 목요일 늦은 퇴근시간,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는데 복도 저 끝에서 누군가가 통화 중이다. “일이 안 끝났는데 어떻게 가냐고. 장모님께 몇 시간만 더 부탁드리고 자기가 먼저 가. 아 정말, 내가 뭘 거짓말을 해? 일 한다고 일. 사진 찍어서 보내?” 아내는 매일같이 늦게 퇴근하는 남편에게 어김없이 잔소리를 하고 남편은 그런 아내에게 질린 듯 소리를 질렀다. 일에 치여서 받은 스트레스를 일주일에 한두 번 술로 달래는 걸 마치 매일 그렇게 사는 인간인 것처럼 자신을 취급하는 아내의 모습이 분명, 예전 연애시절 그녀와는 딴판이겠지. 아이는 평일 중 부모와 보내는 시간이 드물고, 주말은 부모에겐 쉬는 시간이라기보다 가족을 위해 집을 치우고 외식을 하고, 근교라도 나가 추억을 만들어야 하는 일의 연장선이라고 그 짧은 대화가 내게 말하는 듯 했다. 일, 사회생활도 열심히 하면서 사랑과 가정을 함께 지켜내기가 어려운 것이 비단, 개인의 잘못일까? 그저 사랑이 식었기 때문에, 자식이 생겼기 때문에, 나이 들고 나태해져서 모든 것이 힘들어진 것일까? 줄어드는 일자리 못지않게 직장인들의 육아도 일과 가정의 양립을 어렵게 만드는 사회문제가 된 지 오래다. 오르는 물가, 대출이자, 양육비까지 맞벌이가 아니면 답도 안 나오는 요즘, 온전히 육아에만 집중하기에 국가, 사회가 보장해주는 기간은 턱없이 짧고 그마저도 성차별이 여전하다. 모두에게 한정된 시간 속에 일,배우자, 자녀 등등을 한꺼번에 넣어 줄 세우기를 하자니 아무리 스스로가 정한 우선순위가 있다고 한들 지켜지기 어려운 현실. 결혼과 출산이 미래 국가경쟁력을 좌우하는 축이라 하지만, 야근, 회식, 출장에 자유로운 솔로를 인재로 여기는 사회임은 여전하다. 그나마 직원 복지로 ‘가정의 날’을 만들어 일주일에 하루는 한 두 시간 일찍 귀가하는 제도와 여성 및 남성 육아휴직에 대한 인식이 조금씩 넓어지는 것이 희망이라면 희망일까. 제도가 있어도 여러 상황과 사람들 눈치에 제대로 써먹기는 어렵지만 순식간에 오는 변화보다는 꾸준한 움직임이 부작용이 덜할 테니 모두가 믿고 실천할 일이다. 사내커플 1호의 결혼식 날, 축하와 웃음이 가득한 이곳에서도 걱정 한 다발이다. “축하한다. 성수, 애는 하나만 낳아라.” “어째 초고속 결혼이 의심스럽다. 육아휴직은 둘 중 한 명만 써.” “어휴 이제 성수 일은 다했네, 너 칼퇴에 뒤처리는 우리 몫이냐?” “이제 술 한 잔 하려면 제수씨 눈치 봐야 하는 건가? 민이 씨 살살 해줘요.” 농담인 듯 농담 아닌 진담 속에는 우리의 삶이 고스란히 들어있다. 에덴의 동산에서 사랑만 나누는 아담과 이브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현실은 새벽같이 일어나 애 씻기고 먹여 유치원 보내고, 지옥철과 컴퓨터, 커피와 술을 반복하며 살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애는 여럿 낳아라, 육아휴직은 아빠엄마 함께 써야지, 정시 퇴근이 당연하지’라는 말이 자연스러운 사회가 될까? 국가도, 회사도 그리고 나도 오랜 고민이 필요한 중요한 숙제다. 신랑신부가 함께 걸어 나와 주례사와 축가를 들었다. 마음속 걱정과는 달리 모두의 얼굴엔 축복의 미소가 가득했고 우리는 축하의 박수를 끊임없이 보냈다. 드디어 한 장의 긴 편지를 반씩 나누어 읽으며 하객들 앞에 하나 됨을 선언하는 부부. “평생토록 사랑을 먹고 사는 부부가 되겠습니다!” 네, 신랑신부님. 제발 서로를 잡아먹는 부부가 되지는 말자고요! 김소정 월간 인재경영 객원 기자

유료회원전용기사

로그인 또는 회원가입을 해주세요. (유료회원만 열람가능)

로그인 회원가입
저작권자 © 월간 인재경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