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민의 세상보기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영국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묘비명이다. 원문을 그대로 번역하면 “난 알았다. 내가 충분히 오래 머문다(산다)면, 이런 일(죽음)이 생길지를”이다. 하지만 오역된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가 더 매력적으로 들리는 건 나뿐일까? 갑자기 웬 묘비병이냐고? 12월이 되어 올 한 해를 되돌아보니, 해놓은 거 하나 없이 우물쭈물하다 또 한 살 먹게 되는 것 같아서다. 진짜 이러고 살다가 내게도 ‘그런 일’이 다가오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언젠가 직장의 보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인간이 한 짓 중에 가장 발칙한 짓은 멀쩡한 길 위에 선을 그어서 차들이 한 방향으로 다니도록 한 것과 강물처럼 흐르는 시간 위에 금을 그어서 하루와 한 달과 일 년을 만들고 뒤를 돌아보게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어쩌면 우리는 선조들이 그려놓은 시간 위를 달리는 여행자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지구는 태양을 또 한 바퀴 돌았고, 내게는 또 하나의 나이테가 생겨버렸다. 해놓은 거 하나 없이 말이다. 나무는 한 나이테만큼 성장이라도 한다지만, 인간이라는 난 뭘한 걸까? 한 나이테만큼 뱃살만 두둑해졌나! 나이 들면서 성장을 못하면 ‘꼰대’가 된다고 했다. 그래서 먹어가는 나이만큼 필사적으로 성장을 해야 ‘어른’ 노릇에는 못 미쳐도 그나마 ‘나잇값’을 한다고 했다. 환경은 급변하는데 내적 성장은 그대로 정체? 그런 현상은 우리 사회 도처에서 볼 수 있다. 변화한 환경에서 고릿적 방식으로 버티는 사람들이 흔하다는 말이다. 권석천 중앙일보 논설위원이 최근에 쓴 책에서 ‘사람도 자동차처럼 연식이란 게 있다’라는 말을 했다.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어느 시점엔가 성장이 멈춰버리면 그 연도가 그 사람의 ‘연식’이 된다는 말이다. 정말 그렇다면 나는 몇 연식 인간이라서 이다지도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시간 위를 주행하는 걸까? 참 다사다난했다. 지난해 세월호에 이어 올해 메르스까지. 그야말로 숨 쉴 틈 주지 않고 잇달아 충격적인 일이 터지면서 다이내믹 코리아의 또 다른 진수를 보여주었다. 어찌 이런 일들이 자꾸 벌어지는 걸까? 정부의 무능을 탓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아무리 역사책을 뒤져봐도 당대에 유능하다고 평가받은 정부를 찾을 수 없었다. 세상에 ‘충분한 월급’이라는 게 존재할 수 없듯이, 유능한 정부라는 것도 우리의 기대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정부라는 존재에 뭘 기대하는 사람이 어리석다는 말이다. 문제의 원인은 그 놈의 ‘연결’에 있는 것 같다. 연결이 되는 단위의 숫자가 증가하면 경우의 수는 산술급수가 아닌 기하급수로 증가한다. 그나마 인터넷 시대에는 컴퓨터 앞에 앉아야 그 연결이 되었지만, 모바일이 등장하면서 공간의 한계도 넘어버렸다. 실제로 출근 시간대의 지하철 속 우리 모습을 보면 열의 여덟아홉은 스마트폰과 씨름 중이다. 이들 모두 손바닥 위에 놓인 그 놈의 ‘연결기기’를 통해 세상과 단절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 그 놈을 좌뇌, 우뇌에 이은 ‘외뇌(外腦)’라고 말하던데 딱 맞는 것 같다. 심지어 우리 집 아줌마는 화장실에 가실 때도 그 녀석을 들고 가신다. 이쯤 되면 ‘연결강박’이라고 봐야 한다. 그렇게 수십억에 달하는 인간이라는 단위가 실시간으로 연결되는 것도 부족해서 이제는 기기들 간의 연결도 시도하고 있다. 소위 말하는 ‘만물인터넷’이다. 결국 경우의 숫자는 천문학적으로 폭증해서 인간의 통제범위를 벗어난 지 오래고, 하찮은 나비의 날갯짓이 태풍을 불러오는 검은 백조(블랙스완)의 출현빈도도 증가했다. 그러니 매순간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고 우리는 허둥지둥, 우물쭈물하는 거다. 지구는 늘 같은 속도로 태양을 돌고 있지만, 세상의 변화 속도는 로그지수로 가팔라지고 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가는 우리 인간들의 성장 속도는 점점 둔화되고 있다. 이대로라면 자연히 고령화국가가 되면서 꼰대만 풍년이 되는 세상이 될 것이다. 그래서일까? 급격한 변화가 일상이 되었음에도 같은 속도로 성장하지 못하는 인간들과 시스템들이 사단을 내는 일이 뉴노멀이 되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사건과 사고를 원천봉쇄하기는 어렵다. 우리는 그런 일에 ‘적응’을 해야 한다. 막을 수는 없다. 대신 일이 벌어지고 난 다음에라도 배우고 성장해야 한다. 그런데 일이 벌어질 때는 놀라고, 분노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깨끗이 지워버리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아니, 새롭게 발생하는 또 다른 충격에 밀려 과거의 충격이 사라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허겁지겁 대충대충 하루하루를 수습하면서 변화를 쫓아가다 버나드쇼의 ‘그런 일’을 맞이하게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된통 당하면서도 단 한 톨의 배움을 못 얻는 게 아닐까? 정말 그렇다면 우리는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질질 끌려가다 이 나는 존재가 될 뿐이다. 결국 한 살을 더 먹었다. 생겨먹은 게 계획성이란 건 찾아 볼 수도 없고 원초적으로 게을러서 연초의 계획 따위는 세워본 적도 없지만, 그래도 한 해를 뒤돌아보는 정도는 한다. 뒤돌아보니 여전히 ‘우물쭈물’하는 과거의 방식으로 한 해를 일관했다. 허탈하다. 어쩌면 나라는 인간은 20년 전의 연식으로 살면서 ‘우물쭈물’을 수십 번 반복하고 있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이쯤 되면 ‘반성’을 하고 ‘버려야’할 것은 버려야 하는 것 아닐까? 인생의 의미를 찾는 고상한 차원이 아니라, ‘꼰대노인’으로 늙어가 느닷없이 ‘그런 일’을 맞이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지난 1년간 이 공간을 빌려 수많은 말을 했지만 제발 ‘꼰대’가 되지 않도록 필사적인 노력을 하자는 걸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인생이 아무리 공수래공수거라고 하지만, 이제는 의미를 좀 찾고 싶다. 격변하는 시기에 폐차처리 시기가 지난 ‘연식’의 꼰대로 늙어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더구나 주절거리고 있는 나나,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이나 남의 성장을 돕는다는 ‘거창한’ 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우리 일이 정말 그렇다면, 최소한 ‘너나 잘해!’라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면, 또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오지랖’이라는 비아냥을 듣지 않으려면… 이제 좀 꺼야 되겠다. 그 의미 없는 ‘연결강박’을. 그리고 펴야 되겠다. 책을. 진짜 그래야 겨우 열릴 것 같다. ‘꼰대’라는 소리가 귓가에서 들리지 않는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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