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김 다이어리

직장생활 1년 반 만에 주임 명찰을 달고 2년이 넘어가는 지금, 인사총무와 관련된 기본적인 업무는 이제는 어느 정도 숙달이 되어 큰 어려움 없이 일상을 보내고 있다. 여전히 팀의 막내로서 잡다한 일들을 처리하고 있지만, 또래보다 살짝 앞선 눈치와 잔머리 그리고 당찬 성격을 무기로 반복되는 업무는 손 안의 장난감이 된지 오래다. 그러다 보니 업무시간 잡담, 딴짓이 조금씩 늘고 무엇보다 잡생각이 많아진다. 뭔가 다른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데 막상 ‘일 없어요, 더 주세요.’ 말하기는 그렇고, 또 재미난 걸 찾아보자니 그건 일이 아니고. 직장은 그냥 버티면서 월급 꼬박꼬박 받는 게 최고라는 친구의 말이 맞는 걸까? 하지만 이렇게 발전 없이 시간만 보내다가 덜컥 회사를 그만두게 되거나 하면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경력이라 해 봤자 쓸 말이 없으니까, 그 가벼운 이력을 누가 받아주겠어…… 조금 늦은 퇴근길, 버스정류장에서 재무팀 우현 대리님을 만났다. 본인도 혼자 자취를 하는 터라 집에 가면 라면신세이니 같이 저녁이나 하자는 말에 순간 ‘뭐지? 설마 관심이 있는 건가?’라고 생각했지만 역시 불필요한 착각. 우리는 얌전히 국밥을 먹으며 이런저런 회사 얘기를 나눴다. “신형 씨는 여기가 첫 직장이니 이직 생각은 아직 없겠네요?” “무슨 말씀이세요. 입사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하는 고민입니다.” 웃으며 그가 말했다. “물론 공공의 적 한 팀장님 때문이겠죠(농담 삼아 던진 말이겠지만 전혀 틀린 얘긴 아니다). 신형 씨는 다른 회사 가면 진짜 빛을 볼 거예요. 신입으로 들어와서 일도 빨리 배우고 사람들이랑 잘 어울려서 다들 좋아하니까. 내가 괜찮은 회사 찾으면 연결해줄게요. 공공연히 아는 사실인데 나 여기저기 이력서 넣고 준비 중이에요. 재무 파트는 이직이 많으면 경력 인정받기 어려워서 어지간하면 잠자코 있어야 하는데, 여기 3년 다니면서 급여도 안 오르고 회사도 성장할 기미가 안보이고 계속 정체된 느낌이라…… 신형씨 주임 빨리 단 것도 미끼일 수 있어요. 처음에 빨리 올려주고 3, 4년 동결하는 못된 회사들 많거든요. 사원이랑 주임 급여 차이 거의 없죠? 직급에 속지 말고 회사가 나를 얼마나 대우해주는지는 항상 연봉으로 기준 삼아요. 사회 선배로서 해주는 충고니까.” “연봉이란 단어는 아직 남 얘기 같아요. 사회생활 겨우 2년인데 일단 배우는 거죠 뭐. 이직한다고 연봉이 오른다는 보장도 없고, 힘든 시기에 괜히 평생직장 잃으면 어떻게 해요.” 간단히 밥 한 끼 하는 자리에서 너무 심각한 얘기를 꺼내는 것 같아 짜증도 났지만 대화를 이어갈수록 진지해지는 대리님의 표정에서 내 미래의 모습이 보여 남일 같지 않았다. 사업기획이나 영업직은 프로젝트의 성공이나 수주로 역량 발휘하고 인정받으면 단기간에도 큰 폭으로올릴 수 있다지만 경영지원 쪽은 한 자리에서 꾸준히 일해야 경력을 인정받기 때문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나 잘했소’ 이력서에 적어봤자 그것도 가볍게 보이기는 마찬가지. 문제는 한 자리에 계속 있으면 연봉을 올리기 힘들다는 거다. 우리가 직장을 다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돈’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급여가 오르지 않는 건 경력문제 이상으로 고질적인 병이 될 수 있다. 5년 일하고 급여가 제자리이면 그 때서야 이직하려고 애써봤자 능력 없는 사람으로 보일 뿐, 성실함과 끈기라는 좋은 단어는 평가에서 사라지기 쉽다. 이직을 한다고 해도 기존에 받던 금액이 협상의 기준이 되니까 연봉을 올리는 것에도 한계가 있을 터. 여러모로 이직도 머리를 쓰고 타이밍을 잡아야 실패하지 않는다는 말이니 나도 그 ‘시기’를 고민해볼 일이다. “신형, 인턴들 사대보험 신고 마무리했지?” “네.” “어제 임원 보고서 PPT 작업은?” “그거 제가 팀장님 공유폴더에 넣었다고 메모 드렸었는데 못 보셨어요?” “그랬나? 인트라넷 서버 점검표랑 작년 설문 통계는?” 일찌감치 끝내고 보고한 내용을 또 반복해서 얘기하는 것도 슬슬 짜증이 난다. 이렇게 단순한 일만 하면서 쌓아가는 경력이 진정한 경력일까? ‘연봉은 무슨, 저는 아직 배워야 해요.’라며 겸손 떨던 나도 참 가식이지. 본부장님이 가끔 던져주는 미션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이 회사에서 배우거나 성장할 기회는 없지 않을까 걱정이 앞선다. “심심해? 일거리 좀 만들어 줘? 시간이 남으면 스스로 발전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해야지. 일단, 올 상반기 우리 부서 사업계획 중에서 본인 KPI 빼고 다른 항목 중에 배우고 해볼 만한 것들 체크해서 알려줘. 올해 너 이런저런 전문교육 입문 시키려고 업무량 많이 주지 말라고 하셨는데 지금 상태를 보아하니 일 좀 나눠줘도 되겠다.” “전문교육이요?” “그래, 그럼 평생 쉬운 일만 하려고 그랬어? 2년 됐으니 이제는 일 같은 일을 해야지. 예전에 얘기했지. 특별히 원하는 직무가 있는 게 아니면 진득이 있으면서 배우고 경력 쌓으라고. 본부장님이다 생각하고 계획도 짜놓으셨으니 새해 마음 다잡고 열심히 해.” 마치 머릿속을 훤히 드려다 본 듯이 내가 고민하고 답답해했던 부분을 꺼내는 한 팀장님. ‘너를 위한 계획이 이미 세워져 있다’는 말 한마디로 모든 고민은 한 순간에 사라졌다. 근래 생긴 여유는 나뿐만 아니라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밟는 코스일 것이다. 처음에는 서툴고 시간도 걸리던 일들이 한 번, 두 번 횟수를 반복하면서 몸에 익다 보니 그 이후로는 마치 처음부터 잘했던 것으로 착각하고 스스로의 무기력에 빠지는 것. 나 잘났다고 경력, 이직시기 어쩌고저쩌고 떠들었으니 이미 이 길을 거쳐 간 선배들이나 윗사람들이 보기에 얼마나 깜찍할까? 나는 운 좋게도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디딤돌을 본부장님을 통해 받았고 마음만 다잡으면 시간과 능력을 함께 잡고 나아갈 수 있는 환경이 갖추어졌으니 이제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다. 경력, 직장을 다니면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경력직이란 말을 듣는다. 경력이 지니는 의미 중 하나는 시간, 또 하나는 능력이다. 우현 대리님의 이직 걱정에서 보듯이 한 직장을 꾸준히 다닌시간, 그 끈기와 인내에 자신의 업무역량이 더해져야 진정한 경력으로 인정받는 거다. 직장을 들어와 신입 딱지를 떼고 경력직으로 가는 길목에서 내가 느낀 건 반쪽짜리 경력직이 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었다. 능력은 키워지지 않고 시간만 보내어도 경력은 되니까. 하지만 그런 경력은 본인 스스로도 부끄럽고 너무 가벼워 후 불면 날아가 버리는 법. 연봉으로 평가 받는 현실에 제대로 대응하려면 시간 속에서 능력을 키워야 한다는 걸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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