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스 김 다이어리

 “어이 정 사장, 통조림이든 뭐든 세트 300개 기본으로 하고, 신경 좀 써야 할 곳이 스무 곳 정도 되니까 괜찮은 물건이랑 단가 뽑아서 보내고 연락 한 번 하라고. 아니면 주말에 볼 치면서 얘기하던지.”  작년 추석에 이어 올 설에도 회사 자금사정으로 명절 상여가 없다. 다들 어렵다 하는 시기이고 회사 돌아가는 판이야 누구나 알고 있으니 아쉽지만 마음 접는 분위기. 하지만 인사총무팀 입장에서는 늘 주던 것을 못 주니 직원들에게 빚지는 기분이다. 상여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왕 주는 명절 선물만큼은 제대로 된 걸 줘야 하지 않겠냐고 우리끼리 얘기가 오갔으나 정작 사장님은 늘 그래왔듯 오랜 친구에게 똑같은 상품을 주문하실 모양이다. 복도를 지나며 들으라는 듯이 통화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찌나 얄미운지, 직원들의 따가운 눈초리를 막아주는 투명망토라도 걸치신 걸까? 명절 선물은 직원용과 거래처 등에 보내는 대외용까지 치면 무시 못할 금액이라서 모르는 곳 팔아주기보다 절친한 친구 사업에 도움되고자 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그 때문에 직원 복지가 자꾸 제자리걸음이니 속이 터질 일이다. 회사가 어려우니 상여까지는 바랄 수 없다지만 직원들 명절 선물은 그야말로 직원들을 위한 마음을 담아야 하는 것 아닌가. 중요한 거래처에 보낼 선물은 꼼꼼히 고르면서 직원 선물은 대충이라니, 우리 앞에서 말이나 안 했으면 모르고 넘어갔으련만. 물건이 좋고 나쁘고의 문제보다 주는 사람의 마음이 형편없으니 어떻게 복 받으시라 말할 수 있을까.  “그래서 결국 또 캔 쪼가리야? 하필 이 때 본부장님은 미국 연수를 가시냐 그래. 본부장님 계셨으면 사장님이랑 얘기라도 해보지. 다른 임원들은 자기 밥그릇 챙기는 거 외에는 관심도 없을 테고. 상여 대신에 갈비세트 정도는 받아보나 기대했는데 김칫국이었네.”  “통조림도 구경 못하는 회사가 수두룩합니다. 우리 와이프 회사는 상여고 뭐고 명절에 쌀 한 톨 안 나온다니까요. 뭐가 됐든 하나라도 챙겨주면 고마운 거죠 뭐.”  “이 대리, 그렇게 생각하니까 대한민국이 이 모양이야. 왜 상여나 명절 선물이 꼭 회사가 직원들 위해서 일방적으로 베푸는 거라고 생각해? 그거 아니잖아. 같이 고생하고 열심히 했으니까 회사 수익 중 일부를 뜻 깊은 날에 공평하게 나누고 가족들이랑 같이 기쁘게 쓰는 거지. 작은 것에 감사하자 그 말이 잘못됐다는 게아니라, 당연히 누려야 할 모두의 권리를 회사의 전적인 권한으로 자꾸 돌려주지 말자 이거야 내 말은!”  “최 대리님 말씀 듣고 보니 그럴듯하네요. 직원들이 다 같이 고생해서 키워가는 회사고, 사장 개인 돈으로 주는 선물도 아니고 회사비용 쓰는 걸 왜 개인이 생색을 내죠? 거기다가 예전에 크게 이슈된 것도 있잖아요. 정규직과 비정규직은 명절 선물도 차등이라고. 아예 정규직만 챙기는 회사도 있다던데. 아니 명절에도 치사하게 차별을 해야겠냐고요.”  그렇게 요 며칠은 명절 선물 이야기로 뒷담이 한창이다가 연말정산을 비롯한 각 부서별 일로 정신없이 바빠지니 오밀조밀 모였던 군중은 흔적을 감추었다. 회사로 배달된 햄 세트 300개는 직접 찾아가는 몇몇 직원 분량을 제외하고 다시 택배행. 언제 쯤이면 명절이 주는 기분 좋은 설렘을 다시 느낄 수 있을까. 회사 사정이 계속 좋지 않으면 우리는 매번 우울한 표정과 축 늘어진 어깨로 명절을 맞이해야 하는 걸까? 상여나 선물 문제 말고도 회사가 직원들을 대하는 자세와 분위기의 변화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신형, 나 공돈 생겼는데 오늘 애들이랑 한 잔 콜? 신촌 8시야.”  기분도 꿀꿀하겠다, 공짜 술도 마시고 신년회도 할 겸 나간 자리에는 인사총무 3년 차로 접어드는 나와 2년 차 게임 개발자, 광고대행사 AE, 프리랜서 편집 디자이너, 결혼하고 밥솥 운전하는 유부녀까지 다양한 직업군이 오랜만에 한 자리에 모였다.  “오우, 역시 기술자라 그런지 상범이가 항상 여유로워. 뭐 큰 건 해서 밥 사는 거야?”  “아니, 명절 보너스가 생각보다 많이 나왔더라고. 밤낮없이 회사에서 살다시피 하니 돈이라도 많이 받아야지. 명절에도 절반은 출근이고 뭐, 번 돈 가져다 바칠 와이프도 없으니 중생들 구제한다 생각하고 한 턱 쏜다.”  “게임 업계는 쪽박 아니면 대박이라더니, 너는 후자인가보다. 우리는 그나마 나오던 쥐꼬리 보너스도 잘리고, 3만 원짜리 통조림세트가 다야.”  잘나가는 게임회사에서 개발자로 있으니 일도 많고 돈도 그만큼 많이 버는 상범이. 그를 제외하고는 다들 명절에 내 돈 나갈 걱정 말고 기쁠 일이 뭐가 있겠나 싶다. 그 와중에 광고대행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는 채영이가 묘한 미소로 입을 열었다.  “우린 서른 명 남짓이 일하는 작은 회사인데다, 급여도 하는 만큼 받아가는 인센티브제에 두둑한 상여도 없어. 물론 돈을 많이 주면 가장 좋겠지만 그거야 그야말로 회사가 돈이 많아야 가능한 얘기니까 제외하고. 그래서 회사에 충성하고 돈 많이 버니 행복하고 좋으냐?”  채영이는 길게 말을 이어갔다.  “나는 여기로 직장 옮기면서 엄청 걱정했거든. 광고업계가 워낙 경쟁도 심하고 야근에 스트레스에 일이 힘들다 보니 이직률도 높잖아. 특히나 AE는 자기 몫 못하면 본인이 알아서 짐 싸야 하니까. 만약에 유부녀가 나 같은 직업이면 애 키우면서 버티겠어? 절대 불가능이지. 그런데 다니다 보니 크게 돈으로 보상받는 복지는 아니지만 이렇게 일하면 평생 할 수 있겠다 싶게 시스템이 되어 있더라고. 우리는 주 40시간 기본근무 내에서 팀별 주간회의 1회, 월별 전체회의 1회 고정일 제외하고는 완전 자율제야. 사무실, 자택, 외근 상관없이 본인 일 처리하면 되고 개인 볼일도 편하게 보고. 예전 회사 같으면 가족이 아파서 가봐야 하거나, 남자친구랑 특별한 날을 보내고 싶어도 내 일은 둘째 치고 회사나 상사 눈치를 봐야 하잖아. 우린 그런 게 전혀 없어. 평소에 직원들을 배려하고 직원들 스스로 일을 하도록 분위기를 만들어주니까 명절 상여가 어쩌고, 선물이 어쩌고 회사 욕할 일이 없더라고. 보너스 주면 명절이냐? 상범인 가족들이랑 편하게 쉬지도 못하는데. 어차피 회사의 방침이고 개인의 선택 문제겠지만 나는 비교해서 다녀본 결과 직원이 진짜 주인인 회사가 질적으로 낫더라.”  회사를 칭찬하는 직원은 언론 플레이를 통해서만 봤지, 실제로 마주하니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의 말이 진정 사실이라면 나와 우리 회사 사람들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지? 이 좋은 연휴를 코앞에 두고도 기쁘고 설레는 마음보다는 보너스가 나오네 마네, 선물이 캔인지 페트병인지 그마저도 스트레스로 안고 살고 있다. 복지의 기준이 돈인지, 시간인지, 기타 다른 것인지는 채영이 말대로 회사가 정하고 직원들이 받아들이기 나름이지만 공통적으로 필요한건 ‘직원이 다 함께 주인이 되는 회사’라는 인식전환이 아닐까. 합의된 복지 기준으로 모두가 즐겁게 롱런할 수 있는 회사를 구상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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