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민의 세상보기

‘Hard HR의 퇴조’ 역시 노자(老子)의 말씀대로 결국에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것 같다. 미국 대선에 이상한 아저씨 하나가 등장해서 늘 고만고만했던 식상함을 떨치고 묘한 관전 재미를 선사하는 것 같다. 기존 정치인이 오죽 미웠으면 합리적이라는 미국인들이 이런 막장 쇼까지 보여주는지 모르겠다. 올 연말 가장 ‘핫’한 한판 승부가 예정되어 있는 워싱턴, 미국의 정치 심장부인 그곳에서 SHRM(Society of Human Resource Management)의 2016년 콘퍼런스가 열렸다. 전세계 15,000명이나 되는 인사전문가들이 3박 4일 동안 그곳에 머물렀고 200개에 달하는 다양한 주제발표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사람(People)과 관련된 다양한 이슈를 두고 이뤄진 발표들을 살펴보면 몇 년 전부터 묘한 변화가 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인사제도에 대한 발표가 실종되었다는 사실이다. 평가제도가 어떠니, 스톡옵션이 어떠니, 새로운 보상제도가 어떠니 하는 부류의 이야기는 눈 씻고 찾을 수 없다. 이제 미국은 확연하게 소프트 HR로 돌아선 것 같다. 아직 S’HR’M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발표자들은 이미 HR(Human Resource)라는 단어를 쓰지 않는다. 사람이 쓰고 버리는 관리의 대상인 ‘자원’이나 ‘재료’가 아니라는 사실에 모두가 동감하는 것이다. 인적자본(Human Capital)이라는 대체어도 쓰지만 그보다는 사람(People)과 문화(Culture)라는 단어가 대세를 장악했다. 오랜 세월 정교한 제도를 만들고 확산하고 적용을 해봤지만 기대만큼의 성과가 나지 않고 오히려 부작용만 커진다는 깨달음을 얻은 것 같다. 또한 최근 환경이 예측할 수 없이 급변하는 데 반해 설계와 적용에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경직된 인사제도가 현장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한 것 같다. 테일러의 ‘과학적 삽질법’(과학적 관리의 원칙이 원제목이지만 그 책의 내용이 제철소의 삽질에 대해서만 읊어대길래 나는 ‘삽질법’이라고 부른다)이 출간된 1911년부터, 본격적으로 보면 미군의 인사관리 방법론을 기업들이 채택하기 시작한 1950년대부터 미국의 인사프레임을 주도해왔던 제도주의(Hard HR)가 막을 내리는 모양새다. 그 빈자리를 당당히 차지한 것은 기업문화와 이를 만들어내는 리더십이다. 그래서인지 이번 콘퍼런스의 주제는 온통 문화와 리더십뿐이었다. 물론 기본적인 제도가 없이 문화나 리더십이 생겨나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생산직의 태업을 막겠다는 기묘한 미션을 품고 평생을 살았던 테일러나, 죽고 죽이는 전쟁을 치르면서 만들어진 군대의 인사제도는 태생적으로 그 관리의 대상을 긍정인 관점으로 보지 않았다. 이들 제도주의는 원래부터 성악설의 관점을 가졌다. 그래서 지켜야 할 규정과 규제를 자꾸만 만들었다. 더구나 제도는 가만 놔두면 스스로 정교화를 지향한다는 문제를 가지고 있다. 제도는 또 다른 제도를 만들어내면서 스스로 증식한다는 말이다. 그렇게 가로세로의 구획이 정교해지면 가파르게 변화하는 현장과 맞지 않게 된다. 당연히 경쟁이 치열한 현장에서 제도를 위반하는 사례가 자꾸 나오고 결국, 인사담당자들은 화를 내면서 위반을 적발하는 ‘경찰관’ 노릇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잡아도 잡아도 다시 나오는 바퀴벌레처럼 위반은 계속된다. 한마리의 바퀴가 내 눈에 발견되었다는 것은 안 보이는 곳에 20마리의 바퀴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 이런 상황에서 현장 직원들에게 경찰관 노릇을 하는 인사담당자는 세상 물정 모르는 책상물림이거나 더 나가면 성과를 가로막는 장애물로 보일 뿐이다. 미국기업들은 그걸 깨닫고 변화를 맞이했다. 우리는 어떨까? 이 땅에 제도주의가 들어온 것은 멀리 보면 1990년대 초반 삼성과 LG가 시도했던 일본형 직능자격제의 도입이고 좀 가까이 보면 1998년 IMF 외환위기 직후다. 특히 외환위기의 태풍은 무서웠다. 모든 전통적인 제도와 시스템은 당장 쓸어버려야 할 ‘구악(舊惡)’으로 낙인이 찍혔다. 그 빈자리에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간판을 달았지만 전혀 글로벌하지 않은 미국식 제도주의가 밀고 들어와 안방을 차지했다. 환호의 목소리를 높인 건 글로벌 컨설팅 회사였다. 1980년대 미국에 불었던 신자유주의의 광풍에 편승하여 스톡옵션이네, 목표기반 평가제도네 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었던 컨설팅 회사들은 1990년대 후반이 되면서 파리를 날리고 있었다. 이미 그 시점부터 미국에서는 제도주의의 약발이 서서히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이라는 노다지를 발견했으니 얼마나 좋았을까. 한국기업들은 살아남아야 한다는 강박을 가지고 미국기업의 제도를 베꼈다. 여력이 안 되는 회사들은 베낀 회사의 제도를 다시 베꼈다(확실히 제도란 녀석은 베끼기가 쉽다는 장점이 있다). 더구나 세계를 주름잡던 회사들의 제도였으니 실효성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고 그 덕에 전문가인 척하는 사람들이 미국기업의 제도를 소개하고 떼돈을 버는 시대였다. 귤도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데 제도가 태평양을 건너왔으니 뭐가 되었을까? 문화도 가치관도 삶의 기틀도 다른데 뒤죽박죽 혼란과 갈등만 양산되었다. 기업문화는 개판이 되었고 직원들의 삶은 팍팍해짐을 넘어 말라비틀어졌다. Hard HR, Soft HR이라고 자꾸 말하는데 뭐가 딱딱(Hard)하고, 뭐가 부드럽다(Soft)는 이야기일까? 원래 이 개념은 정치학 용어다. ‘Hard’는 미국이 막강한 군사력을 통해서 다른 나라를 압박하고 세계를 지배하겠다는 이야기, ‘Hard Power’를 말한다. 이게 인사로 넘어오면서 눈에 보이는 제도를 통해 직원들을 통제하겠다는 논리로 발전한 것이다. 제시된 것을 위반하면 징벌하겠다는 프레임이자 엄격한 제도를 전제로 하는 제도지향적인 방법론이다. 이게 테일러의 관점이고 미군의 인사제도였다. 이를 미국기업들이 오랫동안 유지해왔는데 요즘 가장 절박한 혁신과 창의성 발휘에 천장효과(Ceiling Effect)가 있고, 결국은 인사부서를 경찰 노릇이나 하게 만든다는 자각이 생겼다. 수많은 연구결과에서도 엄격한 제도가 성과로 연결되지 않고, 직원들의Engagement나 창의성 발현에 역효과가 난다는 것도 확인되었다. 미국의 정치인도 Hard Power를 이용한 외교가 비용만 엄청나게 들어가고 실효는 부족하다는 자각을 하고 Soft Power 쪽으로 전환했다. Soft전략은 미국의 문화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해당 국가에 집어넣어서 간접적 관리를 하겠다는 구상이었다. 근데 이게 의외로 비용 대비 상당한 효과를 거두어 왔다. 그러한 정치영역의 성공이 HR에 넘어온다. 제도와 힘이 아니라 가치와 문화를 직원들에게 내재화시켜서 사람을 바꾸고 움직이겠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요즘 미국 인사쟁이들이 리더십, 문화, 가치 특히 창의성과 Engagement, 신뢰 문제를 가지고 떠들어대는 거다. 그러면 이번에도 우리가 미국의 전환을 한바탕 베껴야 할까? 아서라! 절대 아니다. 생각 없이 베끼는 게 지겹지도 않은가? 그들과 우리는 문화적 법적 토대가 전혀 다르다. 그들은 언제든지 부진자를 해고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리고 최근 ICT 기술의 발달로 임직원들의 개별 성과관리가 가능해진 측면도 있다. 그래서 소프트가 가능한 거다. 물론, 우리는 지나치게 제도주의 쪽에 쏠려 있다는 건 분명하다. 세상이 변하는 만큼 결국 우리도 옥석을 가려가면서 소프트한 쪽으로의 전환은 긴요하다고 하겠다. 다만 우리에게 맞는 방식으로 말이다. 그렇다고 화끈한 우리의 특성대로 소프트의 극단으로 돌진해서는 안된다. 단단함과 부드러움이 우리의 특성과 환경에 맞는 균형지점을 찾아야 한다. 나는 바로 그 지점을 스마트한 사람관리(Smart People Management)라고 생각한다. 그건 그렇고 올 연말, ‘강한 힘으로 밀어붙여야 한다’는 미국의 막가파 아저씨가 이길 수는 없을 거다. 요즘 세상이 어떤데. 게다가 강함이 부드러움을 이길 수 없는 게 세상 이치인데 가당치도 않다. 그런데 막상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나니 걱정은 좀 된다. 지금까지 내가 ‘저 사람이 선출될 거야’라고 공언한 게 맞은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이게 또 입방정이 되어서 머리숱 별로 없는 그 아저씨가 덜컥 되어버리는 거 아닐까? 얼마 전 영국사람들 하는 짓을 보니 세상사 참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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