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회사에서 공장을 새로 짓는 데 진입로가 필요했다. 그런데 시공을 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설계도 상에 계획된 진입로를 실측하는 과정에서 진입로의 한 지점에 있는 길 한가운데에 전봇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을 뒤늦게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건설부서에서 우선 검토해본 결과 전봇대를 제거하거나 옮기는 문제는 전력회사와의 협의가 필요한 것이라 자기 부서의 책임이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그래서 관공서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총무부서에다 ‘공문’을 보내 협조를 요청하였다. 공문을 받은 총무부서는 회의를 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려 건설부서에 정중한 ‘공문’을 보냈다. “귀 부서의 공문은 잘 받았습 니다. 하지만 전력회사는 관공서가 아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저희 부서의 업무가 아님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건설부서는 다시 대외 업무를 관장하는 홍보부에 똑같은 공문을 보냈으나 이러한 답이 돌아왔다. “우리 부서는 홍보를 담당하기 때문에 추후 대외적으로 문제가 생기면 그때 ‘공문’을 보내 주십시오. 그러면 검토하겠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인사부에 ‘공문’을 보내 부서의 책임소재에 관한 조정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얼마 후 인사부로부터 다음과 같은 내용의 공문이 왔다. “귀 부서의 입장을 이해합니다만, 전봇대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인사부는 이에 관여할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공방이 이어지는 사이 어느덧 공장이 완성되어 진입로의 건설을 더는 미룰 수 없는 상황이 왔다. 공장의 전체적인 시공책임을 지고 있는 건설부서는 ‘상부’로부터의 책임추궁이 두려워 어떻게든 자기 일을 끝마쳤다. 그러나 그때까지 전봇대는 그 자리에 있었고, 그렇게 하여 잘 포장된 길 한가운데에 전봇대가 우뚝 서 있는 진입로가 탄생하였다.

근래 들어 우리나라 기업의 비효율성을 논할 때 주로 지적되고 있는 관료주의(Bureaucracy)는 그 발생 배경을 살펴보면 역설적이게도 인류가 발명한 가장 효율적인 사회조직 운영 시스템 중의 하나로 평가받 는다. 인류는 집단화, 사회화, 국가화하면서 그 구성원을 다스리기 위한 효율적인 시스템이 필요해졌다. 이로 인해 피라미드형의 조직을 기본으로 한 특권적 계급체계인 관료제를 구축하여 중앙집권적으로 관리하는 형태의 시스템이 생겼는데 이것이 관료주의의 시초이다. 관료 주의가 가진 분업화, 전문화, 위계서열화, 명문화, 연공서열주의, 권위 주의적인 특징은 높은 효율성과 함께 정치와 행정을 분리할 수 있는 정치중립성으로 인해 그 당시 귀족 중심의 엽관제가 갖고 있던 모순을 상당 부분 해결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시스템은 군대, 정당, 학교 등의 대규모 조직으로 전파되었고, 이어 산업화가 진행됨과 함께 기업과 노동조합, 비정부 조직 등의 사회부문으로 도입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는 근대 이후 전 사회적으로 보편적인 조직운영 방식으로 자리잡았다.

관료주의는 기본적으로 피라미드 형태의 서열체계를 바탕으로 상의 하달, 상명하복 등의 지휘체계를 가진다. 조직특성상 피라미드의 정점으로 향할수록 의사결정의 폭과 책임이 커지는 대신 구성원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범위도 넓어진다. 이로 인해 관리범위 안에서는 많은 양의 업무를 신속히 처리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직무를 분화하여 일정한 자격을 가진 사람을 채용하고 업무를 전문화할 수 있다. 또 연공서열주의로 인해 구성원의 조직에 대한 애사심과 충성심을 고양하고 갈등을 둔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점은 관료주의의 장점으로 꼽히는 부분이다. 관료제 혹은 관료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관료주의는 인간이 만든 조직운영 시스템 중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것이며 현대 사회에 필수적인 것이라고까지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함께 관료주의는 그러한 배경으로 인하여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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