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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에서 만난 세 명의 화가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리모(김현길) 여행드로잉 작가 | 2019년 06월호, 제172호 | 승인 2019.05.31 15:45

제주도는 남북을 경계로 제주시와 서귀포시로 나뉜다. 도시 안에는 지역의 중추를 담당하는 도심이 각각 형성되어 있다. 두 도시는 각각 섬의 북쪽 연안과 남쪽 연안에 면해 있어 지도를 보면 마치 거울을 바라보듯 대칭적으로 위치해 있다. 어떻게 보면 쌍둥이 형제 같기도 한 제주시와 서귀포시.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본 두 도시의 분위기는 확연히 달랐다.

이제 막 비행기에서 내린 상기된 얼굴의 여행자를 가장 먼저 맞이하는 곳. 날이 갈수록 키 큰 건물이 늘어나는 제주시의 도심은 이미 서울의 모습을 너무 많이 닮아버렸다. 안타깝게도 육지와 섬의 관문 역할을 담당하느라 제주 안에 있으면서도 가장 제주답지 않은 곳이 되어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서귀포는 그러한 제주에서 다시 차로 남쪽을 향해 한 시간을 달려야 닿을 수 있다. 비행기에서 내려 다시 차량으로 이동해야 하는 불편 함을 감내해야 비로소 만날 수 있는 곳이지만, 덕분에 남녘의 끝에 있는 아득한 여행지라는 낭만과 환상이 더해진다. 미세먼지가 다소 걷혀 모처럼 하늘이 맑게 반짝이던 어느 날에 다시 서귀포를 찾았 다. 제주시에 비해 아직까지 소도시의 정취가 짙게 남아있는 그곳에서 세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지난 수십 년간 사람과 돈과 문화의 집결지는 바로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이었다. 이러한 편중현상 속에서도 서귀포는 문화·예술인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아온 역사가 있다. 우리나라 남쪽 끝에 있는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지역과 인연이 있는 예술인이 꾸준히 배출되었 는데, 그중에는 서귀포 태생도 있지만, 전쟁을 피해 왔거나 서귀포의 자연에 감화되어 머물게 된 이들도 있다. 추계예술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화가 이왈종 역시 제주의 풍광에 매료되어 섬에 머물게 된 예술인이다. 서귀포에는 1990년에 정착해 제주의 자연과 생활을 담은 <제주 생활의 중도> 시리즈를 그려오고 있다. 정방폭포 입구에 자리한 사립미술관인 <왈종미술관>은 화가 이왈종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개관한 곳으로, 그의 회화와 도예 작품 9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가 하면 원래 고향이었던 제주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예술가도 있다. 1926년 서귀포에서 태어난 변시지는 6세가 되던 해 가족과 함께 일본 오사카로 이민을 떠났었다. 미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그는 오사카 미술학교를 졸업한 뒤, 도쿄로 상경하여 1948년 제34회 광풍회전에서 최연소로 최고상을 수상하며 화제를 모았다. 고향인 제주도에는 1975년에 제주대학교 미술교육과에 재직하면서 다시 정착하게 되었고, 2013년에 향년 87세로 사망하기 전까지 제주의 풍토와 정서를 담은 작품을 그려왔다. 귀국 후 변시지는 제주의 거친 바람과 파도를 특유의 필치로 화폭에 담아냄으로써 '폭풍의 화가'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의 격정적인 작품들은 현재 서귀포시 서홍동 소재의 <기당미술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서귀포에는 잠시 머물렀다 떠났지만, 그 누구보다 강한 여운을 남긴 예술가도 있었다. 1948년 4·3 사건을 겪으며 서귀포 역시 고난의 시기를 보내게 되었는데, 한국전쟁을 계기로 많은 이들이 제주로 피란을 오며, 다시 지역에 활력을 불어넣게 되었다. 그 시기에 머물렀던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화가 이중섭을 빼놓고는 현재 예술의 도시 서귀포를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중섭은 평안남도 평원 출신으로 1951년 1월에 서귀포시로 피란와 11개월간 거주하면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피란 당시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머물렀던 거주지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이중섭의 가족들이 거주했다는 방을 둘러보면, 가장 먼저 공간의 협소함에 놀라게 된다. 네 가족이 머물기엔 너무나 작은 한 평 반 남짓의 방 하나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제주에서의 피란 생활을 끝낸 뒤 이중섭은 부산으로 건너왔고, 생활 고를 이기지 못한 아내와 두 아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긴 이별을 했다. 이중섭은 그 후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도는 유랑 생활,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깊은 좌절과 자괴감으로 쇠약해져 1956년 서울 적십자병원에서 홀로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가 겪은 고난과 좌절에 어울리지 않게 이중섭이 서귀포에서 그린 그림들은 온통 따뜻하고 친근한 느낌들로 가득하다. 먹을 것 없어 근처 자구리 해안에서 잡아온 게로 끼니를 이어야 했던 그 시절이 었지만, 그때의 생활이 그에게 무척 행복한 순간이었음을 짐작해 볼수 있다. 한 평 반 남짓한 작은 방에서 온 가족이 모여 서로의 숨소리를 들으며 살았던 11개월의 피란 생활. 그때의 행복한 기억이 어쩌면 비운의 화가 이중섭의 마지막 창작의 원천이었는지도 모른다.

Tip. 세 화가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곳

왈종미술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칠십리로214번길 30
기당미술관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남성중로153번길 15 대한민국 최초의 시립 미술관이며, 변시지는 '변시지 상설전시실'이 개관되면서 명예관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중섭거리 /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귀동 512 일대 40세에 요절한 천재 작가 이중섭을 추모하기 위해 1996년에 지정된 문화 거리. 이중섭 거주지와 이중섭 미술관이 있으며, 각종 공방을 비롯해 서귀포 예술시장, 서귀포 관광극장 등 새로운 문화공간들도 생겨나 활력을 더하고 있다.

 

리모(김현길) 여행드로잉 작가_
삼성전자 소프트웨어 연구원으로 재직하다 여행과 일상을 그림으로 기록하는 여행드로잉 작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JTBC 드라마 <스케치>에서 그림작가로 참여했으며, 독일 문구업체인 스테들러 후원작가이다. 저서로 「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드로잉 제주」가 있다.
인스타그램 @rimo_kim 공식홈페이지 rimo.me

리모(김현길) 여행드로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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