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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을 이야기하는 바다시간을 멈추는 드로잉
리모(김현길) 여행드로잉 작가 | 2019년 10월호, 제176호 | 승인 2019.09.30 18:12

그날의 아침 공기는 누군가의 긴 한숨 같았다. 제주의 도심은 바다로부터 번져온 희뿌연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이따금 불어 온 바람이 잠시 안개를 밀어낼 때면, 저 멀리 신호등 불빛이 보였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안개가 전해주는 의외의 포근함 때문이었을까. 외로운 풍경 속에 있었지만, 많이 슬프지는 않았다. 문득 작별이라는 단어에 어울리는 곳에 가고 싶어졌다. 잠깐의 고민 후 보이지 않는 바다를 오른쪽에 두고 일주서로를 시계 반대방향으로 달려갔다. 목적지는 제주의 서쪽 끝이었다.

하루가 온통 우중충함으로 채워지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해가 높이 떠오르자 안개는 서서히 그 힘을 잃어갔다. 서쪽을 향해 달려가는 동안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의 화사함을 찾아가고 있었다. 목적지인 용수리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하늘이 푸르게 개어 있었다. 기분 좋게 마을 안으로 시선을 옮기자 등대를 닮은 독특한 첨탑을 가진 건물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지난 2006년에 개관한 '김대건 신부 표착기념관'이었다. 김대건 신부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다. 그는 1845년 4월에 사제서품을 받기 위해 제물포(인천)에서 상해로 떠났다가, 그로부터 약 5개월 후인 9월에 13명의 천주교도와 입국을 시도했다. 그날도 오늘처럼 짙은 안개가 가득했던 탓이었을까. 배는 불운하게도 돌아오는 와중에 난파되었고, 그는 우여곡절 끝에 용수리 해안에 표착해 목숨을 건졌다. 한국 천주교 역사의 첫발을 디딘 현장으로, 본관 오른편에는 그때 타고 온 라파엘호가 복원되어 전시되어 있었다.

용수리는 제주올레 12코스의 종점이자 13코스의 시작점이다. 고산리까지 바다를 끼고 이어지는 길이 아름다워, 차를 이용하지 않고 걷기로 했다. 올레길은 차귀도를 내려다볼 수 있는 당산봉 능선을 향해 뻗어 있었는데, 경사가 완만해 그리 힘들지 않았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아직 꽃을 틔우지 않은 억새와 청량한 파도 소리가 함께했다.

당산봉을 넘어가면 만날 수 있는 고산리는 여러모로 매력이 넘치는 동네다. 바다를 향해 탁트인 넓은 평야가 있으며, 제주에서는 드물게 논농사가 가능했던 곳이다. 마을 안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들판의 좌우로 당산봉과 수월봉이 나란히 솟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마치 그 모습이 거대하고 튼튼한 대문처럼 느껴졌다. 너른 품으로 마을을 가득 안아주는 그 모습에 마음이 무척 든든해졌다.

느긋한 시간을 보내다 갑자기 발걸음이 초조해졌다. 생각했던 것보다 서둘러 찾아온 일몰 때문이었 다. 차귀도가 잘 보이는 해안가에 자리를 잡은 뒤 서둘러 스케치북을 펼쳤다.

오늘의 태양은 점점 바다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한 장의 그림을 그리며, 오후의 낮고 따뜻한 빛이 구슬픈 보랏빛으로 변해가는 것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고산리는 행복했던 오늘과의 가장 황홀한 이별이 있는 동네였다.

 

리모(김현길) 여행드로잉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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