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여기자의 일상다반사

Episode 10.

예전 어른들은 ‘내리사랑’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사전적 의미는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사랑함, 또는 그런 사랑, 특히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을 이른다’라고 쓰여 있다. 드물게 뉴스를 통해서 그에 반하는 범죄 사건들을 접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세상에 태어난 모두는 ‘내리사랑’이라는 마르지 않는 샘을 하나씩은 지니고 태어난 금수저들이다. 그럼에도 철없던 시절 우리는 부모에게 혼이 나거나, 불만이 있거나, 심보가 뒤틀렸을 때 속으로든 입밖으로든 이런 말도 서슴없이 했었다.

“누가 나 낳으라고 했어?”
“내가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났어?”

스스로 태어나기를 원한 것도 아니고 부모를 콕 짚어 세상에 난 것도 아니지만, 줄곧 먹을 거 다 먹고 놀 거 다 놀면서 뭐가 그리 불만이고 불행인지 세상 모든 악조건을 자신에게 갖다 붙이며 사춘기 놀음을 했던 우리. 곰곰 다시 생각하면 부모 역시도 착하고 똑똑하고 인물 좋고 효도하는 그런 핏줄을 원하지 않았을까. 부모도 똑같이 자식을 선택하여 기를 권한은 없었다.

안정된 직장 없이 줄곧 내키는 대로 일하고 쉬기를 반복한 탓에 모아둔 목돈도 크게 없고, 명절이나 생신 때 생색용으로 조금 챙겨드리는 용돈을 빼면 ‘이게 자식 노릇이다’ 시원하게 한 방 날려 본 적도 없는데, 이제 시집마저 가면 영영 내 부모에게는 빚쟁이 딸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에 요즘 울컥울컥 화가 치민다. 엄마아빠는 왜 되돌려 받지 못할 시간, 돈, 노동, 마음을 나를 위해 썼을까. 그렇게 힘들게 키웠음에도 내게 부나 성공, 명예, 효를 단 한 번도 바란 적 없는 그런 마음이 정말 가능한 걸까. 예전에는 마냥 당연하고 좋았던 ‘내리사랑’이라는 말이 부쩍 거슬려서 여기저기 물었다.

“이유가 어디 있어. 너도 자식 낳아봐. 먹고 살기 힘들다고 부모 드릴 용돈은 줄여도, 제 자식 먹이고 가르치는 건 빚을 내서라도 쓰는 게 부모야.”

한결같이 너도 낳아보면 알 거란다. 그래, 하물며 조카만 봐도 예쁜데 자식은 오죽할까. 하지만 나는 그런 무한한 사랑, 당연한 사랑을 묻는 게 아니다. 우리의 부모는 사랑보다는 ‘희생’에 가까운 삶을 살았고 또한 살고 있다는게 화가 난다. 사랑만 듬뿍 주면 되지, 왜 희생을 하느냐는 말이다. 자식 가슴 아프게.

사회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는 “여기 아니어도 갈 곳 있어, 무슨 일이든 먹고는 살겠지”하며 안일하게 살다가 어느덧 10년이라는 직장생활(중간에 쉬고 논 기간을 빼면 7~8년 되려나)을 돌이켜 보니, 정말이지 삶이 녹록치 않다. 새벽, 밤늦은 시간 하루하루 애쓰며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사무직은 고사하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이꼴저꼴 다 보고 산 우리 부모는 그렇게 고생해서 나를 먹이고 공부시킨 보람, 결과를 어디서 찾을 수 있나.

먹이더라도, 공부를 시키더라도 ‘어떻게 해서 매일 따뜻한 밥을 먹을 수 있는지’, ‘어떤 돈으로 학교를 다니고 책을 살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값을 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철저하게 가르쳤어야 했다. 제대로 산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이렇게 허상의 세월로 나이만 먹다 보니, 부모의 그 무한한 희생이 얼마나 더 한스럽고 눈물이 되는지 모른다.

앞으로 자식을 낳고 기를 한 사람으로서, 부모라는 업(業)을 찬찬히 따지고 새겨본다. 내리사랑이 그저 부모의 희생과 자식의 눈물로 끝맺지 않으려면 보다 현명한 내리사랑이 필요할 것 같다. 부모가 자식을 거둬 먹이는 일방이 아니라 가정을 함께 키워가는 구성원으로서 자식도 오름사랑을 실천하도록 가르쳐야 하지 않을까.

내 부모를 위한 밥상 한 번 제대로 차려보지 못했으면서 남편, 시부모,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내리사랑을 엮어 오름사랑도 할 줄 아는 ‘보은(報恩)’하는 어른이 되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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