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질이 만연한 사회 2013년경부터 ‘갑질’이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기 시작하더니,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 이후 이 말은 국경을 넘어 세계에 알려졌다. 뉴욕 타임즈에서 땅콩 회항 사건을 보도하면서 ‘Gapjil’이라는 알파벳으로 표기했고, 이윽고 옥스퍼드 영어사전에도 이 단어가 등재되었다고 한다. 외국이라고 갑질과 비슷한 일이 없겠는가마는, 우리말을 그대로 발음표기 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것이 우리나라에 특징적으로 존재한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 부끄러운 일이다. 이후 우리 사회에서는 갑질에 대한 공분과 경각심이 많이 고조되었지만, 여전히 우리의 분노샘을 자극하는 갑질 관련 기사는 끊이지 않는다. 재벌 오너들의 갑질과 폭력은 더 이상 생소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아파트 주민의 갑질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경비원의 이야기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얼마 전 성희롱 피해를 묵살당하고 극단적 선택을 한 여군 중사 역시 넓은 의미에서 갑질의 피해자이다. 사회 곳곳에서 묵묵히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항상 갑질에 노출되어 있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갑질은 빙산의 일각 일 뿐이다. 지금 이 순간도 어디선가 크고 작은 갑질사건이 끊임없이 발생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정말로 갑질이 만연한 사회이다. 갑질을 하는 이유 사람들은 왜 갑질을 하는 것일까? 갑질은 일반적으로 분노와 관계되어 있다. 실제로 심리전문가들은 갑질의 행태에 대해 ‘분노조절장애’라는 진단을 내린다고 한다. 물론 상습적이고 정도가 심한 갑질은 그럴 수도 있으나 사실상 모든 분노가 갑질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분노 그 자체는 잘못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분노는 인간이 자신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자신과 그 소속 집단이 정당한 권익을 침해당했을 때 일어나는 분노는 결코 나쁜 것이 아니다. 둘째, 분노표출 대상의 문제이다. 자신보다 약한 상대, 즉 ‘을’을 향해 분노를 표출해야만 갑질이 된다. 만일 더 강한 상대에게 도의적으로 정당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갑질이 아니라 숭고한 용기와 정의가 된다. 그러니 갑질은 단순히 분노조절의 문제이기보다는 덕성의 문제이며,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구조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갑질이 사회구조와 관련이 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 모든 사회에는 구조적으로 상대적 강자와 약자, 즉 갑과 을이 있을진대,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서 갑질이 더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일까? 그 뿌리에는 우리나라의 사회적 병폐의 단골 근본원인으로 지목되는 유교가 있지 않을까? 과연 그렇다. 경희대학교 사회학과의 송재룡 교수는 “우리 사회의 ‘갑질 문제’가 개인 차원의 심리·정서적 태도나 자질의 문제가 아닌 ‘문화적 경향성’의 문제”라고 하며, 그 뿌리를 유교에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의 ‘갑질문화’의 뿌리는 역사적으로 깊으며, 그 근원은 “유교의 차등적 윤리규범에 기초한 형식·위계적 권위주의 문화에 있다.”고 했다. “이 위계적 권위주의 문화는 우리 사회 속에 차별·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위계적 지배구조의 일상화를 형성하는 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유교학 전공자인 필자에게는 뼈아픈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갑질의 뿌리, 유교문화(?)

아마도 많은 사람이 송 교수의 견해에 동의할 것이다. 기왕 유교에는 유교망국・신분차별・여성차별・반동보수 등 많은 죄목(?)이 씌워져 있으니 여기에 ‘갑질’ 하나 더 추가한다고 더 크게 나빠질 이미지도 없다. 그러니 필자는 여기서 갑질의 뿌리가 유교인지 아닌지 논쟁을 하고 싶지는 않으며, 양약고어구(良藥苦於口)의 심정으로 충고를 달게 받아들일 뿐이다. 다만 갑질의 뿌리로 지목된 유교사상 속에서 갑질 극복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을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갑과 을이 형성되는 것은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피해갈 수 없는 일 일 것이다. 사회가 형성되면 위계질서가 동반하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다. 아무리 작은 사회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위계가 형성될 수 있는 요소, 즉 나이・재능・재력・완력 등 여러 가지 조건과 능력의 차이가 힘의 불균형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사회 속에서 갑을 관계의 형성은 필연적인 것이다. 갑을관계가 형성된다고 해서 갑질도 피할 수 없는 것일까? 힘을 가진 사람이 힘이 약한 사람을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인가? 총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사람을 마음대로 죽여도 되는 것이 아니듯, 권력이 있다고 그것을 약자에게 마음대로 휘둘러도 되는 것은 아니다. 총을 사용한 살상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만든 사람을 비난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사용한 사람을 비난해야 옳다. 그러고 보면 갑질을 단순히 사회구조의 문제로만 돌릴 것이 아니라, 그것을 행하는 사람의 덕성의 문제와 연결시켜야 한다. 더욱이 유교는 갑질을 조장하는 사상이 아니라, 갑질을 애초에 차단하고자 했던 사상임에랴. 유교의 갑질 극복방안 신분에 따라 사람을 차별하고 여성을 억압한 것은 전근대시대 거의 모든 문화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지 유교의 전유물이 아니다. 가령 15세기의 영국과 프랑스에 신분 차별과 여성 억압이 있다고 해서 그곳을 유교사회라고는 하지는 않는다. 엄격한 상하관계 역시 유교의 산물은 아니다. 사실상 우리가 생각하는 그 반대이다. 일반적으로 왕이 신하보다 높다고 생각하지만 유교국가에서는 왕권(王權)이 결코 신권(臣權)보다 강하지 않았다. 공자는 임금을 매우 존중하기는 했지만 임금이 잘못을 범하면 여러 번 직언을 하다가 그래도 듣지 않으면 지체 없이 떠나버렸다. 맹자는 한술 더 떠서 임금도 감히 오라 가라 할 수 없는 불소지신(不召之臣)임을 자처했다. 실제로 맹자는 임금을 알현하려 집을 나서다가도 임금이 사신을 보내서 왕궁에 좀 와 달라고 하자,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다시 집으로 들어가 버렸다. 관료와 백성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교사회의 위정자였던 사대부는 백성의 민생을 살피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고 민폐를 끼치는 것을 가장 경계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교의 어떤 사상에서 갑질을 극복할 방안을 찾을 수 있을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지면의 제약 상 두 가지만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존중하는 인(仁)의 정신을 회복하는 것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사회의 각종 명칭 속에 숨어있는 개인 고유의 가치를 발견하고 존중하는 것이다. 갑질은 근본적으로 인간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지 않고 수단이나 도구로 치부하는 데서 출발한다. 더욱이 오늘날의 산업사회는 인간의 도구화를 더 용이하게 만든다. 일례로 우리는 자신과 타인의 정체성을 ‘신분’이나 ‘직함’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한 사람의 독립되고 고유한 인격체로서가 아니라, 어느 학교의 학생, 어느 회사의 직원이라고 하는 레떼르로 평가하고 평가받는 것이다. 이러한 레떼르는 결코 그 사람의 ‘본질’이 아니며, 단지 한 사회에서 일시적으로 가지는 ‘역할’에 대한 명칭일 뿐이다. 본질을 망각하고 그것이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일수록 ‘갑질’을 일삼을 확률이 높아진다. 둘째, 인(仁)의 정신을 바탕으로 서로를 존중하는 예(禮)의 회복이다. 존중은 갑질의 반대편에 가장 멀리 있는 말이다. 예는 지위나 연배가 낮은 사람, 즉 ‘을’이 일방적으로 ‘갑’에게 지키도록 의무 지어진 것이 아니다. 공자가 “임금은 신하를 예를 갖추어 부려야 하고, 신하는 임금을 진심을 다해 섬겨야 한다.[君使臣以禮, 臣事君以忠.]”(『논어』 「팔일편」)고 했듯, 또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사 람[富而無驕]’보다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富而好禮]’을 더 수준 높은 사람으로 평가했듯(『논어』 「학이편」), 오히려 ‘갑’이 ‘을’에게 더 철저하게 지켜야 하는 것이 바로 예(禮)이다. 공자의 말처럼 갑이 되어서도 예를 잃지 않는다면, 우리 사회의 갑질은 대부분 사라지지 않을까? 사람을 그 자체로 존중한다는 것 신분관계가 철저했던 유교사회 속에서, 그 신분을 넘어 인간존중을 실천했던 한 선비의 예를 들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조선의 유학자 퇴계 이황의 이야기이다. 퇴계가 68세가 되던 해, 맏손자 안도(安道)에게서 아들이 태어났다. 퇴계는 이 증손자의 탄생을 매우 기뻐하여 그를 극진히 아꼈다. 그런데 이 증손자는 태어난 지 만 2년이 되지 않아 심한 병을 앓았고, 엄마에게 젖이 나오지 않아 제대로 영양섭취를 하지 못해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손자는 퇴계에게 시골에 있는 출산한지 얼마 되지 않은 여종을 유모로 삼을 수 있도록 서울로 보내달라고 했다. 그러나 퇴계는 이를 거절했다. 엄동설한에 갓난아이가 딸린 종을 서울로 보내는 것은 그 모자(母子)를 죽음으로 내모는 것인데, 비록 종의 신분이지만 내 자식을 살리자고 그를 사지(死地)로 모는 일은 차마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얼마 후 증손자는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고 퇴계는 그 아픔을 감내해야 했지만, 사람이 모두 존중받아야 하는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는 하늘의 이치를 거스르지는 않았다. 이러한 인간존중의 정신에 ‘갑질’이 끼어들 틈은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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